* 백자부(白磁駙) - 김상옥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노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風磬)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빗겨 날고 시내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純朴)하도다 *
* 홍매(紅梅)
얼음 밑에
개울은 흘러도
남은 눈 위엔
또 눈이 내린다.
검은 쇠붙이
연지를 찍는데
길 떠난 풀꽃들
코끝도 안 보여
살을 찢는 선지
선연한 상처
내 영혼 스스로
입을 맞춘다. *
* 빈 궤짝
마루가 햇빛에 쪼여 찌익찍 소리를 낸다. 책상과 걸상과 화병, 그 밖에 다른 세간들도 다 숨을 쉰다.
그리고 주인은 혼자 빈 궤짝처럼 따로 떨어져 앉아 있다. *
* 사향(思鄕)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 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도 도로 애젓하오 *
* 귀여운 채귀(債鬼) -도화(陶畵) 1
사슴이 삼(蔘)꽃을 먹고 덤불에 숨어 똥을 눈다.
똥 속에 섞인 삼(蔘)씨가 뿌리를 내린다. 휘두른 귀얄 자국 위에 애기 손바닥 같은 삼(蔘)잎이 돋아난다. 이 귀여운 손바닥은
빚 갚아라, 빚 갚아라, 재촉을 한다. 몇 세기(世紀)를 두고도 갚지 못할 빚을ㅡ어쨌든 빚 갚아라, 빚 갚아라, 재촉을 한다.
인제는 씨도 뿌리도 다 말라 버렸는데 그날의 삼(蔘)꽃은 언제 피나? *
* 연적(硯滴)
손에 쥐고 왔다 다시 옮겨 쥐어준다.
그가 데운 온기, 내 살에 스미는 백자
이 희고 둥근 모양을 어따 도로 옮기나
흙이 불에 들어 한줌 뭉친 눈송이!
손과 손을 거쳐 오늘 여기 내온 모양
시시로 볼에 문질러 눈을 감고 찾는다.
눈에 묻은 때는 눈으로 씻어내고
마음 어린 그림자 마음으로 굽어보다
어드메 홈대를 지르고 다시 너를 채울까 *
살구나무 허리를 타고 살구나무 혼령이 나와
채선(彩扇)을 펼쳐 들고 신명나는 굿을 한다.
자줏빛 진분홍을 돌아, 또 휘어잡는 연분홍!
봄을 누룩 딛고 술을 빚는 손이 있다.
헝클린 가지마다 게워 넘친 저 화사한 발효
천지를 뒤덮는 큰 잔치가 하마 가까워오나부다.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청자부(靑磁駙)
보면 깨끔하고 만지면 매촐하고
신(神)거러운 손아귀에 한줌 흙이 주물러져
천년 전 봄은 그대로 가시지도 않았네.
휘넝청 버들가지 포롬히 어린 빛이
눈물 고인 눈으로 보는 듯 연연하고
몇포기 난초 그늘에 물오리가 두둥실!
고려의 개인 하늘 호심(湖心)에 잠겨 있고
수그린 꽃송이도 향내 곧 풍기거니
두 날개 향수를 접고 울어볼 줄 모르네.
붓끝으로 꼭 찍은 오리 너 눈동자엔
풍안(風眼)테 너머 보는 한아버지 입초리로
말없이 머금어 웃던 그 모습이 보이리.
어깨 벌숨하고 목잡이 오무속하고
요조리 어루만지면 따사론 임의 손길
천년을 흐른 오늘에 상기 아니 식었네.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묵(墨)을 갈다가
묵을 갈다가
문득 수몰된 무덤을 생각한다.
물 위에 꽃을 뿌리는 이의 마음을 생각한다.
꽃은 물에 떠서 흐르고
마음은 춧돌을 달고 밑으로 가라앉는다.
묵을 갈다가
제삿날 놋그릇 같은 달빛을 생각한다.
그 숲속, 그 달빛 속 인기척을 생각한다.
엿듣지 마라 엿듣지 마라
용케도 살아 남았으니
이제 들려줄 것은 벌레의 울음소리밖에 없다.
밤마다 밤이 이슥토록
묵을 갈다가
벼루에 흥건히 괴는 먹물
먹물은 갑자기 선지빛으로 변한다.
사람은 해치지도 않았는데
지울 수 없는 선지빛은 온 가슴을 번져난다 *
* 신경림[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글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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