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노숙 - 김사인

효림♡ 2008. 12. 30. 08:10

* 노숙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 지상의 한 칸   

세월은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닿는

둘째놈 애린 끝이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 비는 재주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가릴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 본다

밖에는 바람 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 김사인시집[밤에 쓰는 편지]-문학동네,1999

 

* 한 사내  

한 사내 걸어간다 후미진 골목 

뒷모습 서거프다 하루 세 끼니 

피 뜨거운 나이에 

처자식 입 속에 밥을 넣기 위하여 

일해야 하는 것은 외로운 일 

몸 팔아야 하는 것은 막막한 일 

그 아내 자다깨다 기다리고 있으리 

차소리도 흉흉한 두시 

고개 들고 살아내기 어찌 이리 고달퍼 

비칠비칠 쓰레기통 곁에 소변을 보고 

한 사내가 걸어간다 어둠 속으로 

구겨진 바바리 끝엔 고추장 자욱. *

 

* 거울

겁에 질린 한 사내 있네

머리칼은 다복솔 같고 수염자국 초라하네

위태롭게 다문 입술 보네

쫓겨온 저 사내와

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내가

세상 끝 벼랑에서 마주 보네

손을 내밀까 악수를 하자고

오호, 악수라도 하자고

그냥 이대로 스치는 게 좋겠네

무서운 얼굴

서로 모른 척 지나는 게 좋겠네 *

 

* 아무도 모른다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후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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