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설 - 이외수
안개꽃은
싸락눈을 연상시킵니다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어느 날 해묵은 기억의 서랍을 떠나
이 세상 어딘가에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방황해 보아도
겨울은 끝나지 않습니다
불면 속에서
도시는 눈보라에 함몰하고
작별은 오래도록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랑이
꽃으로 피어나게 된다면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아무래도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
*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부는 날에는
바람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더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
*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살아 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 안으며
나지막히
그대 이름을 부른다
살아 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
* 가을엔 맑은 인연이 그립다
가을엔 맑은 인연이 그립다
서늘한 기운에 옷깃을 여미며
고즈넉한 찻집에 앉아
화려하지 않은 코스모스처럼
풋풋한 가을 향기가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 한 잔을 마주하며
말없이 눈빛만 바라보아도
행복의 미소가 절로 샘솟는 사람
가을날 맑은 하늘빛처럼
그윽한 향기가 전해지는 사람이 그립다
찻잔속에 향기가 녹아들어
그윽한 향기를 오래도록 느끼고 싶은 사람
가을엔 그런 사람이 그리워진다
산등성이의 은빛 억새처럼
초라하지 않으면서
기품이 있는 겉보다는 속이 아름다운 사람
가을엔 억새처럼 출렁이는
은빛 향기를 가슴에 품어 보련다
* 11월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
* 집
영혼이 외로운 거미 한 마리구름과 구름 사이 실을 걸어
떠다니는 허공에다 집 한 채를 지었다
이 높은 하늘까지
무슨 벌레들이 날아오랴
지나가는 새들이 비웃었다
하지만 어찌
먹이만을 위해서 한 평생을 살아가랴
밤이면 거미줄에 걸리는 별빛
한 줄의 시를 모르고 살았다면
그대여 부끄러움에 낯을 붉히라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더욱 멀리라 *
* 날마다 하늘이 열리나니
팔이 안으로만 굽는다 하여
어찌 등 뒤에 있는 그대를 껴안을 수 없을까
내 한 몸 돌아서면 충분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