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정진규 시 모음

효림♡ 2009. 1. 19. 08:27

* 이별 - 정진규
서러워 말자
나는 늘 경계만 헤맨다
넘어가지는 않는다
너를 드나들지는 않는다
넘어가면 내 집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나는 안다
너 또한 그러하리
우리는 위험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이별을 익혀왔다
간절해지면 겨우 경계까지 가기는 간다
경계만 헤맨다
해질 때까지 거기서 놀다가 돌아온다
그래, 나는 경계를 가지고 논다
그것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경계는 이어진 곳이 아니라,
넘어가는 다리가 아니라
나를 지켜주고 있는 극단이다
이별이 허락하는 극단의 내 집이다
극단의 약이다 극약이다 부드러운 극약이다
나는 이 극약을 먹으며 논다
맛있는 슬픔, 오래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있고 네가 있다 *

 

* 이별 2   
어제는 안성 칠장사엘 갔다

잘생긴 늙은 소나무 한 그루 나한전(羅漢殿) 뒤뜰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마다 골고루 잘 벋어나간 가지들이 허공을 낮게 높게 어루만지고는 있었지만

모두 채우지는 않고 비어있는 자리를 비어 있는 자리로 또한 채우고 있었지만

제 몸이 허공이 되지는 않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지는 않고 허공과 제 몸의 경계를

제 몸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허공이있고

늙은 소나무가 거기 있었다

서러워 말자 *

 

* 별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

 

* 화(和)

이슬은

하늘에서 내려온 맨발

풀잎은

영혼의 깃털

고맙다

서로 편히 앉아

쉬고 있다.

허락하고 있다.

 

* 몸시 26 -자안(字眼)  

입술이든 자궁이든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다른 곳으론 들지 않겠고

오직 네 눈으로만 들겠으며

세상의 모든 빗장도 그렇게 열겠다

술도 익으면 또록또록 눈을 뜨거니

달팽이의 더듬이가 바로 눈이거니

너와 함께 꺾은 찔레순이

바로 찔레의 눈이거니

아, 자안(字眼)이란 말씀도 있거니

글자에도 살아 있는 눈이 있거니

모든 것엔 눈이 있거니

나는 오직 그리로만 들겠다 *

 

* 몸시 32 -풀잎

내가 그들을 먹은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먹었다

기쁘다!

먹힐 수 있음의 기쁨을 아느냐

오랜만에 나는 아주 잘 먹혔다

나는 요즈음 먹힌다 이렇게

어딜 가서나 먹힌다 누구에게나

내가 참 맛있게 되었나 보다

 

소여물을 썰면서

작두에 풀을 먹이면서

아버지는 풀잎이 잘 먹힌다고 하셨다

고마우신 아버지

맛있는 아버지

고마우신 풀잎! *

 

* 눈 내리는 숲이 되어  
아직은 이른 저녁
참으로 이런 눈은 오래간만이라서
집으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서
한 잔의 생맥주를 혼자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길을 첫번째로 꺾게 하고
다시 눈 내리는 숲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길을 두번째로 꺾게 했다
그동안 내가 겪었을
눈 내리는 밤의 다른 추억들도
내리는 눈으로 다 지워지고
그렇게 눈 내리는 숲으로만 갔다

그렇게 가서 나도
한 그루 가문비나무로 서 있게 되었다
붙박이로 서 있게 되었다
눈 내리는 숲이 되었다
즐겁게 그쪽 몸이 되는
즐겁게 그쪽 몸이 내 몸이 되는
아름다운 굴종을 알았다
네가 어서 와서
그렇게 나를 안아주길 기다린다
눈 내리는 숲이 되어 *

 

* 숲의 알몸들

  올해는 대설주의보가 잦았다 회사후소(繪事後素)*로 한 밤내 눈 내린 아침 화계사 청솔숲 작은 암자

한 채로 기울고 있었다 눈빛 흰빛의 음덕이었다 직립이란 없다 서로를 버티게 해주는 이쪽 저쪽의 힘을,

사방 기울기를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내린 눈들의 무게와 흰빛들의 비유가 숲의 알몸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건너뛰는 청설모의 속도마저 한눈에 가늠할 수 있었다

나무들의 사이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건드리면 쨍 소리를 낼 듯 공기들의 살얼음이 팽팽했다 이쪽 청솔이 오른쪽으로 기운 만큼 그만큼만 저쪽 청솔이 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런 사방 기울기의 연속무늬를

보았다 오늘 아침은 눈들이 담아 온 하늘 무게만큼 조금씩 더 기울고들 있었다

슬픔의 중량이 어제 오늘 더해졌다 하나 *

* 회사후소(繪事後素)-그림 그리는 일은 그 바탕이 희게 극복된 다음이라야 한다는 뜻의 [논어]一句.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모과 썩다  

올해는 모과가 빨리 썩었다 채 한 달도 못갔다 가장 모과다운 걸, 가장 못생긴 걸 고르고 골라 올해도 제기 접시에 올렸는데

천신하였는데 그 꼴이 되었다 확인한 바로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는 모과였기 때문이라는 판명이 났다 썩는 것이 저리

즐거울까 모과는 신이 나 있는 눈치였다 속도가 빨랐다 나도 그렇게 판명될 수 있을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을까 글렀다

일생一生 내가 먹은 약만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 나는 아예 글렀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그토록 일찍 끝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을까 첫 사랑은 늘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연고다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 절정에서는 금방인 저 쪽이 화안하다 비알 내리막은 속도가 빠르다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저승내는 시고 달다 그런 연고다

 

* 삽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

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

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

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

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

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

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 다시 쓰는 연서(戀書) 
사랑이여 그렇지 않았던가 일순 허공을 충만으로 채우는, 경계를 지우는 임계속도(臨界速度)를 우리는 만들지 않았던가 허공의 속살 속으로 우리는 날아오르지 않았던가 무엇이 그 힘이었던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

 

* 연애질

새로 연애질이나 한번 작해 볼까 대패질이 잘 될까
결이 잘 나갈까 시가 잘 나올까 그게 잘 들을까 약발이
잘 설까 지금 '빈 뜨락에 꽃잎은 제 혼자 지고 빈방엔
거문고 한 채 혼자서 걸려 있네'*
그대 동하시거들랑
길 떠나보시게나 이번엔 마름질 한번 제대로 해보세나
입성 한 벌 진솔로 지어보세나 *

* 고시 일절

 

* 축이법

우리네 젓갈을 한자말로 축이라고 쓴다 그 글자에도 무슨 내력이 있기야 하겠으나,버린 물고기들을 거두어 먹을 수 있도록 한 우리네 조상들의 무슨 가여운 뜻이 거기 숨어 있기야 하겠으나 그 젓갈의 곰삭은,심각한 맛을 지닌 여자(女子)가 하나 내 곁에 있음을,지금 함께하고 있음을 나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심각(深刻)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생선회가 생선 중의 생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생초단(初段)이다 날것을 날것 자체로 익혔다는 것 그것도 못쓰게 될 것들을 살려냈다는 것 그것도 소금의 쓰라림만으로 익혀냈다는 것 그게 심각(深刻)이다 나는 기쁘다 싱싱한 상처라는 말을 이제 쓸 수도 있겠다 *

 

* 비누 
비누가
나를 씻어준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믿고서 살아왔는데
나도 비누를 씻어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몸 다 닳아져야 가서 닿을 수 있는 곳,
그 아름다운 소모(消耗)를 위해
내가 복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누도 그걸 하고 있다는 걸
그리로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내 당도코자 하는 비누의 고향!
그곳의 어디인지는 알 바 아니며
다만
아무도 혼자서는 씻을 수 없다는
돌아갈 수 없다는
나도 누구를 씻어주고 있다는
돌아가게 하고 있다는
이 발견이 이 복무가
이렇게 기쁠 따름이다 눈물이 날 따름이다 *

 

* 율려집(律呂集) 14 -연꽃들

연꽃들엔 충만의 속도를 화알짝 하늘 햇살로 열어젖히는 당당한 초록 이파리가 있다 마침내 등을 가득 내어 걸었다 방죽을 가득 채웠다 화안해졌다 연전 내가 크게 절망했을 때 전주 덕진공원 연못 가서 새벽 연등 내어걸고 두 번째다 화안해졌다 가득 채우기, 절망의 절망으로 가득 채우기 채우는 속도가 실물로 눈에 보였다 속도의 실물을 처음 보았다 자라 오르는 생물의 속도가 저리 번지듯 빠른 것은 처음 보았다 무얼 멕인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넘치지 않게 가장자리의 끝에서는 속도는 지우는 연꽃들 피었다 내 안에서도 문 열고 나오는 그런 속도가 보였다 장에 가면 보체리 사람들 어쩐 일이냐고 얼굴이 모두 화안해졌다고 연꽃이 피었다고 야단법석이었다 마을 노인회장집 막내며느리는 쌍둥이를 순산했고 그래, 연꽃들의 野壇法席 , 안산 풀섶에선 없던 반딧불이가 밤새도록 충만의 속도로 함께 반짝였다 어디로 건너가고 있었다 화안해졌다 *

 

* 모기 친구

  진종일 뛰어놀고서도 씻지 않으려 하기에 얼굴엔 온통 암괭이를 그리고서도 말을 듣지 않기에 지난 밤 모기에 물린 자리가 발갛게 부어올랐기에 모기는 깨끗한 것보다는 더러운 걸 더 맛있어한다고 겁을 주었더니, 그럼 모기에겐 깨끗한 것이 더러운 거고 더러운 것이 깨끗한 거네, 모기가 목욕을 해주었잖아! 더러운 걸 먹어버렸잖아! 난 모기 친구가 될 거야 그러곤 여섯 살짜리 내 상욱이는 깔깔깔 달아나버렸다. * 

 

* 미수(未遂) ㅡ알 6

  글씨를 모르는 대낮이 마당까지 기어나온 칡덩쿨과 칡순들과 한 그루 목백일홍(木百日紅)의 붉은 꽃잎들과

그들의 혀들과 맨살로 몸 부비고 있다가 글씨를 아는 내가 모자까지 쓰고 거기에 이르자 화들짝 놀라 한 줄금

소나기로 몸을 가리고 여름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매우 빨랐으나 뺑소니라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상스러웠다

그런 말엔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없었다

  들킨 건 나였다 이르지 못했다 미수(未遂)에 그쳤다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옛날 국수 가게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

* 정진규시집[본색]-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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