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조용미 시 모음

효림♡ 2009. 2. 25. 08:18

* 봄, 양화소록 - 조용미  

올봄 하릴없어 옥매 두 그루 심었습니다
꽃 필 때 보자는 헛된 약속 같은 것이 없는 봄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군요
내 사는 곳 근처 개울가의 복사꽃 활짝 피어 봄빛 어지러운데 당신은 잘 지내나요
나를 내내 붙들고 있는 꽃 핀 복숭아나무는 흰 나비까지 불러들입니다
당신은 잘 지냅니다
복사꽃이 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봄날이 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아슬아슬 잘 지냅니다
가는 봄 휘영하여 홍매 두 그루 또 심어봅니다 나의 뜰에 매화 가득하겠습니다

 

* 겨울  논
눈 온 뒤 겨울 논바닥 내려다보면
인화문(印花紋)이다
빽빽한 문양을 찍고 백토를 채워 넣은,
흰 눈이 덮인
논은 커다란 분청사기
들은 도자기 가득한 가마터
저 촘촘한 무늬
사이로
꼬불꼬불 몇 사람이 인화(印畵)된다
먼 길 가는 검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허공에 인화되어 박힌다
귀얄문처럼 바람이 휘익
들을 쓸고 지나간다 *

* 조용미시집[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지

 

* 꽃 나무 아래

꽃 핀 오동나무를 바라보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하다
하늘 가득 솟아 있는 연보랏빛 작은 종들이 내는
그 소릴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오동 꽃들이 내는 소리에 닿을 때마다
몸이 먼저 알고 저려온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내 몸이
가얏고로 누운 적이 있었던 걸까
등에 안족을 받치고 열두 줄 현을 홑이불 삼아 덮고
풍류방 어느 선비의 무릎 위에 놓여
자주 진양조로 흐느꼈던 것일까
늦가을 하늘 높은 어디쯤에서 내 상처인 열매를
새들에게 나누어 준 적도 있었나
마당 한켠 오동잎 그늘 아래서
한세상 외로이 꽃이 지고 피는 걸 바라보며
살다 간 은자이기도 했을까
다만 가슴이 뻐개어질 듯
퍼져 나가려는 슬픔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꽃 핀 오동나무 아래 지나간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나와 오동나무 사이에
다만 가슴이 뻐개어질 듯
해마다
대낮에도 환하게 꽃등을 켠
오동나무 아래 지난다

 

* 햇빛 따라가다
저물녘, 집으로 돌아오는 당신을
멀리까지 마중나가보고 싶습니다
어스름이 깔린
집 근처의 나무들이 눅눅해지는 그곳으로

 

따스한 외투와 목도리를 두르고
차가워질 여윈 손은 주머니에 넣고서
조금 멀리, 당신이 오고 있을
푸른빛이 짙어서 깊어가는 어둑한 그 길을 따라

 

그런 날이 오겠지요
아마 오겠지요 그런 날을 기다린 줄도 모르게

 

햇살이 커튼 뒤에 불을 켜듯 화안하게
푸른 연꽃을 피워 올렸다 꺼뜨리는 저녁 무렵
하루가 열렸다 닫히고 또 열리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쩌면 당신을 마중 나가는 일도 깜빡할 날들이
아마 오겠지요
그런 날들을 기다린 줄도 모르게

 

푸른 연꽃이 커튼 자락에
밤낮으로
세상에 없는 그 꽃들을 수미단에서처럼
크고 화안하게 피워올리겠지요
햇빛이 그 일을 도와주겠지요

 

나는, 햇빛 따라가겠습니다 *

 

*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나의 내면이 고요할 때

바람은 어디에 있었나

 

생나무 가지가 허옇게 부러진다

버즘나무 널따란 잎사귀들이 마구 떨어져 날린다

개태사 앞 향나무는 뿌리채 뽑혀 쓰러졌다

마당에 기왓장이 나뒹군다

 

바람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키 큰 소나무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없는 나무들조차

내게로 몰려오고 있다

 

이때 폭풍은 나무의 편이다

나무들은 폭풍의 힘을 빌려 내게로

침입하려 하고 있다

 

속이 울렁인다 저 나무들의 혼이 들어오면

나는 무엇이 되는 걸까

 

머리칼에 바람이 갈가리 찢긴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와

약한 나무들의 혼을 찾아 멀리 달려가고 있다

 

숲이 심장처럼 펄떡이고 있다

 

* 달과 배롱나무

서원(書院)의 자미목(紫薇木)은 그믐처럼 붉었다

햇살이 하얗게

하얗게 달구고 있는

그믐의 한낮

 

자미목 붉은 꽃들 위로

상현에서 하현까지의 달이

까맣게 떠올랐다

 

혓바닥으로

이지러지고 차오르는 여러 개의 달을

아대는

자미목의 뜨거운 꽃들

 

붉은 꽃들의 자궁에서 피어나

달은

세상을 온통 뜨겁게 물들이고 있었

 

* 탐매행(探梅行)

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드는 것을*

病中 매화를 보러 나선다
매화 보려면 아픈 것일까
해마다
매화 피면 몸이 먼저 안다

정당매, 남명매, 남사리 홍매 보고
백운산 자락 지나 해남 간다
차밭에 드문드문 심은 1년생 백매를 근심하는 스님
20년 전 심으셨다는 저 홍매도
내 탐매행에 넣을까

매화 한 잎 띄워 놓고
물고기 바라보며 혼자 암자를 지키는 한나절
초당 방문 앞을 어른거리는 매화향에
겨우 몸을 일으킨다

暗香에 病이 깊어가는 것인가
매화나무에 흰나비가
꽃잎인 듯 나비인 듯
날아다닌다
* 두보 시에서 인용 
 

 

* 어비산(魚飛山)
물고기의 등에 산이 솟아올랐다
등에서 산이 솟아오른 물고기는 탱화(幀畵) 속에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 속의 물고기는 날개를 달고 있었다

탱화 속의 물고기를 나는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커다란 산을 지고 물 속을 떠다녔던 적이 있는 것 같다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아도 등에 돋아난 죄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비산(魚飛山)에 가면 물고기들이 날아다녔던 흔적을 볼 수 있을까
산에 가는 것을 미루다 물고기의 등을 뚫고 나온 사리를 본다 물고기는 뼈를 삭여 제 몸 밖으로 산 하나를 밀어내었다

날아 다니는 물고기가 되어 세상을 헤매고 다녔다
비가 쏟아지면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정에서 푸덕이며 금과 옥의 소리를 낸다는 만어산(萬魚山)과

그 골짜기에 있는 절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일만 마리 물고기떼의 적멸, 폭우가 쏟아지던 날 물고기들이 내는 장엄한 풍경소리를 들으며

만어사의 옛스님은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

탱화 속의 물고기와 어비산과 만어사가 내 어지러운 지도 위에 역삼각형으로 이어진다
등이 아파오고 남쪽 어디쯤이 폭우의 소식에 잠긴다 만어석(萬魚石) 꿈틀거리고 눈물보다 뜨거운 빗방울은 화석이 된다 *

 

* 자미원 간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  
오늘 하루 이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은
저 바위가 서 있는 것과 나무의자가 놓여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나를 태운 기차는 청령포 영월 탄부 연하 예미를 지나
자미원으로 간다
그 큰 별에 다다라서도 성에 차지 않는지
무한의 너머를 향해 증산 사북 고한 추전으로 또 달린다
명왕성 너머에까지 가려 한다
 
검은 탄광지대에 펼쳐진 하늘,
태백선을 타면 원상결 같은 작자와 시대 미상의 천문서를 탐하지 않아도
紫微垣에 닿을 수 있다
탄광 속에는 백일흔 개의 별이 깊숙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 별에 이르는 길은 송학 연당 청령포 영월 예미......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  
북두칠성과 자미원의 운행을 짚어보는 것은
저 엄나무가 우뚝 서 있는 것과 새털구름이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

* 조용미시집[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지 

 
* 봄날 나의 침묵은  

불행이란 몸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 
몸이 없다면 어디에 불행이 있을까* 

봄날 나의 침묵은 꽃핀 나무들로 인한 것 
하동 근처 꽃 핀 배나무밭 지날 때만 해도 
몸이 다시 아플 줄 몰랐다 
산천재 앞 매화나무는 꽃 피운 흔적조차 없고 
현호색은 아직 벌깨덩굴 곁에 숨어 있다 
너무 늦거나 빠른 것은 봄꽃만이 아니어서 
한잎도 남김없이 만개한 벚꽃의 
갈 데로 다 간 흰빛을 경멸도 하다가 
산괴불주머니 텅 빈 줄기 푹 꺼져들어가는 속을 
피리소리처럼 통과해보기도 하다가 
붉은 꽃대 속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몸이 견딜 만하면 아팠던 때를 
잊어버린다 내 몸이 늘 아프고자 한다는 걸 
누워 있으면 서 있을 때보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는 이유를 또 잊어버린다 
통증이 살며시 등뒤로 와 나를 껴안는다 
몸을 빠져나간 소리들 갈데 없이 떠도는 
꽃나무 아래 
  

* 노자의 도덕경」에서 인용한 글

 

* 조용미(曺容美)시인 

-1962년 경북 고령 출생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2005년 김달진 문학상 수상

-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성부 시 모음  (0) 2009.03.05
유안진 시 모음  (0) 2009.02.26
이외수 시 모음  (0) 2009.02.23
정진규 시 모음  (0) 2009.01.19
기형도 시 모음  (0) 2008.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