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노천명 시 모음

효림♡ 2008. 12. 9. 08:18

* 이름 없는 여인 되어 -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
 

 

* 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본댔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본댔자

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무엇입니까  

술 한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

 

* 저녁 별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하나 나하나 별두울 나두울
논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소리- 들은지 오래
고향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

* 노천명시집[사슴]-미래사

 

*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따 내리는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려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되다 

산너머 지나온 저 촌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와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

* 노천명시집[사슴]-미래사

 

* 자화상

5척 1촌 5푼 키에 2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前時代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고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삼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고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竹)처럼 꺽어는 질지언정

구리(銅)처럼 휘어지며 꾸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

* 노천명시집[사슴]-미래사

 

* 장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우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

* 신경림의 처음처럼

 

* 들국화

들녘 비탈진 언덕에 늬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 틈에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들의 색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칠은 들녘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아름 고이 안고 돌아와
화병에 너를 옮겨놓고
거기서 맘대로 자라라 빌었더니
들에 보던 그 생기 나날이 잃어지고
웃음 걷는 네 얼굴은 수그러져
빛나던 모양은 한잎 두잎 병들어갔다
아침마다 병이 넘는 맑은 물도
들녘의 한 방울 이슬만 못하더냐
너는 끝내 거칠은 들녘 정든 흙냄새 속에
맘대로 퍼지고 멋대로 자랐어야 할 것을ㅡ
뉘우침에 떨리는 미련한 손은 이제
시들고 마른 너를 다시 안고
푸른 하늘 시원한 언덕 아래
묻어주려 나왔다
들국화야!
저기 늬 푸른 천정이 있다
여기 의 포근한 갈꽃 방석이 있다 *

* 노천명시집[사슴]-미래사

 

* 임 오시던 날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

* 노천명시집[사슴]-미래사

 

 * 푸른 오월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 탑 우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우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구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데 하늘을 본다

기인 담을 끼고 외따른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혼잎나물 적갈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

 

* 작약 
그 굳은 흙을 떠받으며
뜰 한구석에서
작약이 붉은 순을 뿜는다

늬도 좀 저 모양 늬를 뿜어보렴
그야말로 즐거운 삶이 아니겠느냐

육십을 살아도 헛사는 친구들
세상 눈치 안 보며
맘대로 산 날 좀 장기(帳記)에서 뽑아보라

젊은 나이에 치미는 힘들이 없느냐
어찌할 수 없이 터지는 정열이 없느냐
남이 뭐란다는 것은
오로지 못생긴 친구만이 문제 삼는 것

남의 자(尺)는 남들 재라 하고
너는 늬 자로 너를 재일 일이다

작약이 제 순을 뿜는다
무서운 힘으로 제 순을 뿜는다 *

 

* 망향(望鄕)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ㅡ

 

아이들이 한울타리 따는 길머리론

鶴林寺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잔나비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山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뻑국채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년들은 

금방맹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길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講道상을 치며 설교하던 村

그 마을이 문득 그리워 

아라비아서 온 班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곳

조밥과 수수엿이 맛있는 고을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叢)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 

* 노천명시인[사슴]-미래사

 

* 소녀 

뺨이 능금 같을 뿐 아니라

다리가 씨름꾼 같아

 

내가 슬그머니

질투를 느낌은

그 청춘이 내게 도전하는 까닭이다

 

* 가을날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은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ㅡ
예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 없이 밟으며
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들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맛자락 휩싸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소리가 맑다

 

* 노천명(盧天命)시인

-1912~1957 황해도 장연 사람

시집 [산호림(珊瑚林)][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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