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현승 시 모음

효림♡ 2008. 11. 28. 21:47

* 눈물 -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

 

* 꿈 

내가 四月에 피는 수선(水仙)을 사랑함은
내가 그대의 아름다운 눈동자
기억하여 잊지 못함도

내 꿈의 그리매를 어렴풋이나마
저 自然과 그대의 얼굴에서 바라볼 수 있기에......

내 꿈이 사라질 때
나의 사랑도 나의 言語도
나의 온갖은 비인것 뿐

이렇듯 빛나고 아름다운 그곳에 서서
언제나 내 갈 길을 손짓하여 주는

내 꿈은 나의 영원한 깃발
나의 영원한 품!


*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 가을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

 

* 가을의 향기  
남쪽에선

과수원에 능금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가을의 시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 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

 

* 지각(知覺) - 행복의 얼굴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여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 새해 인사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굴러라
건너 뛰듯
건너 뛰듯
오늘과 또 내일 사이를 뛰어라
새옷 입고
아니, 헌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굴러라 발굴러라
춤추어라 춤추어라 * 

 

* 자화상(自畵像)  

 

내 목이 가늘어 회의(懷疑)에 기울기 좋고

 

혈액(血液)은 철분(鐵分)이 셋에 눈물이 일곱이기

 

포효(咆哮)보담 술을 마시는 나이팅게일.....  

 

마흔이 넘은 그보다도

 

뺨이 쪼들어

 

연애(戀愛)엔 아주 실망(失望)이고  

        

눈이 커서 눈이 서러워

 

모질고 사특하진 않으나

 

신앙과 이웃들에 자못 길들기 어려운 나 ―  

          

사랑이고 원수고 몰아쳐 허허 웃어 버리는

 

비만(肥滿)한 모가지일 수 없는 나 ― 

 

내가 죽은 날

 

단테의 연옥(煉獄)에선 어느 비문(扉門)이 열리려나?

 

 

* 슬픔

 

슬픔은 나를


어리게 한다


슬픔은


죄를 모른다


사랑하는 시간보다도 오히려


슬픔은 내가


나를 안는다

아무도 개입할 수 없다

슬픔은 나를

목욕시켜준다

나를 다시 한 번 깨끗게 하여준다

슬픈 눈에는

그 영혼이 비추인다

고요한 밤에는

먼 나라의 말소리도 들리듯이

슬픔 안에 있으면

나는 바르다!

신앙이 무엇인가 나는 아직 모르지만

슬픔이 오고 나면

풀밭과 같이 부푸는

어딘가 나의 영혼.....

 

* 김현승시집[가을의 기도]-미래사

 

 

* 무등차(無等茶)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11월의 긴 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양 마음에 젖는다 *

 

* 겨울나그네
내 이름에 딸린 것들
고향에다 아쉽게 버려두고
바람에 밀리던 플라타나스
무거운 잎사귀 되어 겨울길을 떠나리라

구두에 진흙덩이 묻고
담쟁이 마른 줄기 저녁 바람에 스칠 때
불을 켜는 마을들은
빵을 굽는 난로같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우리라

그곳을 떠나 이름 모를 언덕에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머리 들고 나란히 서서
더 멀리 가는 길을 우리는 바라보리라

재잘거리지 않고
누구와 친하지도 않고
언어는 그다지 쓸데없어 겨울옷 속에서
비만하여 가리라
눈 속에 깊이 묻힌 지난 해의 낙엽들같이

낯설고 친절한 처음보는 땅들에서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에 잠기면
겨우내 다스운 호올로에 파묻히리라

얼음장 깨지는 어느 항구에서
해동의 기적소리 기적(奇蹟)처럼 울려와
땅속의 짐승들 울먹이고
먼 곳에 깊이 든 잠 누군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 절대 고독(絶對孤獨)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ㅡ 나의 시(詩)는. *
 

* 파도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일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칠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

* 김현승시집[가을의 기도]-미래사 

 
* 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神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
 

 

* 김현승(金顯承)시인 

-1913~1975 평양 사람

-1934년 [동아일보]에 등단, 1973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시집 [김현승시초][절대고독][김현승시선집]...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천명 시 모음  (0) 2008.12.09
꽃 시 모음  (0) 2008.12.08
김동명 시 모음  (0) 2008.10.22
한용운 시 모음  (0) 2008.08.01
정희성 시 모음  (0) 2008.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