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정희성 시 모음

효림♡ 2008. 7. 30. 10:00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않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 가을날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

* 정희성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 그날도 요로코롬 왔으면

감꽃 지자 달린

하늘 젖꼭지

그대여 날 가는 줄 모르고

우리네 사랑 깊을 대로 깊어

돌아다보면 문득

감이 익겠네

 

*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겠느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

 

* 맞수  

  바둑판을 무겁게 만든 건 이유가 있어서일 게다. 장기를 잘 두던 앞집 친구 일남이와 마주 앉으면 저녁 먹으라부르러 올 때까지 일어설 줄을 몰랐는데 그걸 늘 못 마땅히 여기던 아버지가 하루는 장기판 앞에 나를 불러 앉혔다. 열 판이면 열 판 아버지는 외통수에 몰려 쩔쩔 매었고 일수불퇴인지라 물려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내가 오줌 누러 갔다 와도 얼굴이 벌개진 채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끙끙 앓으며 장기알만 만지작거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남들이 늘 하는 대로 따먹은 상(象)이나 마(馬)따위를 딸그닥거리며,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하고 약을 올렸던 것인데 그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하며 장기판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놈의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 가만히 생각해보니 장기판이 너무 가벼워서 장기를 오래 두다보면 사람도 그렇게 경망스러워지는가보다 싶어, 그다음부터는 아버지하고 장기는 안 두고 바둑만 두기로 마음에 다짐을 두었던 것이다. *

 

* 내가 아는 선배는

  술만 취하면 그 얘기였다. 그날도 시장 근처 늘 가던 술집에서 거나하게 마시고 취한 김에 주모를 불러 영화배우 허장강이 하던 식으로,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 하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을렀던 것인데 여자가 그날따라 선선하게 문단속하고 갈 테니 요  앞 여관에 먼저 가 기다리라고 하더란다. 그래 얼씨구나 싶어 그 여자와 잠자리에서 같이 먹을 요량으로 바나나 두 개 홍시 두 개 귤 몇 개인가를 사 비닐봉지에 담아들고 콧노래 흥얼대며 들어가 잠자리 펴놓고 기다리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금방 온다던 사람이 안 오는 거라. 그래 주섬주섬 바지를 꿰어입고 나가보니 술집은 벌써 불이 꺼져 썰렁하고 달만 휘영청 밝은데 전봇대 밑에오줌을 깔기며 닭 쫒던 뭐 모양으로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다 그길로 곧장 집에 들어갔던 것인데, 그때까지 잠도 안자고 기다리던 자식놈이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받아들고 아빠 이게 뭐야 하면서 애비 한입 먹어보라 리도 안하고 게눈 감추듯하는 모양을 보고, 무어라 말은 못하고 내 그놈의 집 두 번 다시 가나 봐라 입술을 깨물며 물을 삼켰다는 것이다. *

 
* 태백산행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

 

* 희망 

그 별은 아무데서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


* 어둠속에서

빛 안에 어둠이 있었네

불을 끄자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냈네

집은 조용했고

바람이 불었으며

세상 밖에 나앉아

나는 쓸쓸했네 *

 

* 봄날

날 좋다 햇빛 알갱이 다 보이네

하늘에서 해가 내려 알을 슬어놓은 듯

볕 바랜 이불호청 해 냄새 난다

꺄르르 가시나들 웃음소리에

울밑에 봉선화도 발돋움하겠네 *

 

* 청명

황하도 맑아진다는 청명날

강머리에 나가 술을 마신다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

머리칼 날려 강변에 서면

저물어 깊어가는 강물 위엔

아련하여라 술취한 눈에도

물 머금어 일렁이는 불빛 *

 

* 산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


* 초승달

혹은

이상한 나라의 밤하늘에 몸을 숨긴

모습 없는 고양이의 웃음! *

 

* 붉은 꽃 
어디쯤일까 어디 쯤일까
그리움 가는 길에 발돋움하고
누구를 향한 마음에
이렇게 몸부림쳐 붉은 꽃일까
먼 발치로 사라지는 세월을 두고
한 세상 마당귀에 불을 지르네 *

 

* 시(詩)를 찾아서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를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소나기
날 기울고 소소리바람 불어 구름 엉키며
천둥 번개 비바람 몰아쳐 천지를 휩쓸어오는데
앞산 키 큰 미루나무 숲이 환호작약
미친 듯 몸 뒤채며 雲雨의 정 나누고 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러 달려나가고 싶다 

 

* 정희성(鄭喜成)시인

-1945년 경남 창원 출생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변신] 등단, 1981년 김수영문학상, 1997년 시와시학상 ,2001년 만해문학상 수상

- 시집 [답청][저문 강에 삽을 씻고][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돌아다보면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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