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고재종 시 모음

효림♡ 2008. 7. 22. 08:58

*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 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無明)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 

* 2002년 제16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 날랜 사랑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마음산책 

 

* 쓸쓸함이 때로 나를 이끌어  

변의 늙은 황소가 서산 봉우리 쪽으로 고개를 쳐들며 굵은 바리톤으로 운다  
밀감빛 깔린 서쪽 하늘로 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 봉우리 를 느린 사 박자로 넘는다  
그리고는 문득 텅 비어 버리는 적막 속에 나 한동안 서 있곤 하던 늦가을 저녁이 있다  
소소소 이는 소슬바람이 갈대숲에서 기어나와 마을의 등불 하나하나를 닦아내는 것도 이때다

 

* 파안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
*고재종시집[날랜 사랑]-창비 

 

* 獨居 

가벼이 보지 마라
청둥오리 날아오르는 일

통통통통, 얼음강 차고 솟는
붉게 언 두발 보아라
활활활활, 된바람 불지피는
겨운 날갯짓이며
청청청청, 찬 하늘 치받아
푸르게 멍든 대가리 보아라

그마저 없다면
저 써늘한 허공을
무엇으로 채우겠느냐 *

*고재종시집[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시와시학사


* 첫 봄나물  

얼어붙었던 흙이 풀리는 이월 중순

양지바른 비탈언덕에 눈뜨는 생명 있다
아직도 메마른 잔디 사이로 

하얀색 조그만 꽃을 피운 냉이와
다닥다닥 노란색 꽃을 피운 꽃다지와 
자주색 동그란 꽃을 층층이 매단 광대나물

저 작은 봄나물들이 첫봄으로 푸르다

저 작은 것들이 지난 가을 싹을 틔워

몇 장의 작은 잎으로 땅에 찰싹 붙어

그 모진 삭풍의 겨울을 살아 넘기고

저렇듯 제일 먼저 봄 처녀 설레게 한다

냉이 꽃다지 광대나물, 그 크기 워낙 작지만

세상의 하 많은 것들이 제 큰 키를 꺾여도

작아서 큰 노여움으로 겨울을 딛고

이 땅의 첫 봄을 가져오는 위대함의 뿌리들 *

 

수선화, 그 환한 자리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
 

 

* 첫사랑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

 

* 미루나무 연가 
저 미루나무
바람에 물살쳐선
난 어쩌나,
앞들에선 치자꽃 향기.
저 이파리 이파리들
햇빛에 은구슬 튀겨선
난 무슨 말 하나.
뒷산에선 꾀꼬리 소리.
저 은구슬 만큼 많은
속엣말 하나 못 꺼내고
저 설렘으로만
온통 설레며
난 차마 어쩌나,
강물 위엔 은어떼빛.
차라리 저기 저렇게
흰구름은 감아돌고
미루나무는 제 키를
더욱 높이고 마는데,
너는 다만
긴 머리칼 날리고
나는 다만
눈부셔 고개 숙이니,
솔봉이여 혀짤배기여
바람은 어쩌려고
햇빛은 또 어쩌려고
무장 무량한 것이냐.

 

* 들길에서 마을로 
   해거름, 들길에 선다. 기엄기엄 산그림자 내려오고 길섶의 망초꽃들 몰래 흔들린다. 눈물방울 같은 점점들, 이제는 벼 끝으로 올라가 수정방울로 맺힌다. 세상에 허투른 것은 하나 없다. 모두 새 몸으로 태어나니, 오늘도 쏙독새는 저녁 들을 흔들고 그 울음으로 벼들은 쭉쭉쭉쭉 자란다. 이때쯤 또랑물에 삽을 씻는 노인, 그 한 생애의 백발은 나의 꿈. 그가 문득 서천으로 고개를 든다. 거기 붉새가 북새질을 치니 내일도 쨍쨍하겠다. 쨍쨍할수록 더욱 치열한 벼들, 이윽고는 또랑물 소리 크게 들려 더욱더 푸르러진다. 이쯤에서 대숲 둘러친 마을 쪽을 안 돌아볼 수 없다. 아직도 몇몇 집에서 오르는 연기. 저 질긴 전통이, 저 오롯한 기도가 거기 밤꽃보다 환하다. 그래도 밤꽃 사태 난 밤꽃 향기. 그 싱그러움에 이르러선 문득 들이 넓어진다. 그 넓어짐으로 난 아득히 안 보이는 지평선을 듣는다. 뿌듯하다. 그 뿌듯함은 또 어쩌려고 웬 쑥국새 울음까지 불러내니 아직도 참 모르겠다. 앞강물조차 시리게 우는 서러움이다. 하지만 이제 하루 여미며 저 노인과 나누고 싶은 탁배기 한 잔. 그거야말로 금방 뜬 개밥바라기별보다도 고즈넉하겠다. 길은 어디서나 열리고 사람은 또 스스로 길이다. 서늘하고 뜨겁고 교교하다. 난 아직도 들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게 좋으나, 그 어떤 길엔들 노래 없으랴. 그 노래가 세상을 푸르게 밝히리. *

 

* 상처의 향기 
나는 보았네, 지난 봄날 지리산에서
나와 딱 마주쳤을 때 멀뚱멀뚱거리다간
점점 호동그래지던 고라니의 눈을.
내가 꽃발 꽃발을 딛고 다가가자
순간 후다닥 산정으로 튀는데, 그와 동시에
주위에 아득아득 퍼지던 향기를.
그 날랜 발이 천리향 그루를 건드렸던 것인데
꽃가지가 찢기고 꽃들이 흩어진 나무는
그 향기를 마음속 천리까지 끼치더라니!

계곡에서 일던 생생한 바람이여
상처에서 일던 너의 그리움이여

* 담양 한재초등학교의 느티나무  

어른 다섯의 아름이 넘는 교정의 느티나무

그 그늘 면적은 전교생을 다 들이고도 남는데
그 어처구니를 두려워하는 아이는 별로 없다
선생들이 그토록 말려도 둥치를 기어올라
가지 사이의 까치집을 더듬는 아이
매미 잡으러 올라갔다가 수업도 그만 작파하고

거기 매미처럼 붙어 늘어지게 자는 아이

또 개미 줄을 따라 내려오는 다람쥐와
까만 눈망울을 서로 맞추는 아이도 있다
하기야 어느 날은 그 초록의 광휘에 젖어서
한 처녀 선생은 반 아이들을 다 끌고 나오니
그 어처구니인들 왜 싱싱하지 않으랴
아이들의 온갖 주먹다짐, 돌팔매질과 칼끝질에 
한 군데도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지 끝에 푸른 울음의 별을 매달곤 해도
반짝이어라, 봄이면 그 상처들에서
고물고물 새잎들을 마구 내밀어
고물거리는 아이들을 마냥 간질여댄다

그러다 또 몇몇 조숙한 여자 아이들이

맑은 갈색 물든 잎새들에 연서를 적다가
총각 선생 곧 떠난다는 소문에 술렁이면
우수수, 그 봉싯한 가슴을 애써 쓸기도 하는데
그 어처구니나 그 밑의 아이들이나
운동장에 치솟는 신발짝, 함성의 높이만큼은
제 꿈과 사랑의 우듬지를 키운다는 걸

늘 야단만 치는 교장 선생님도 알 만큼은 안다
아무렴, 가끔은 함박눈 타고 놀러온 하느님과
상급생들 자꾸 도회로 떠나는 뒷모습 보며
그 느티나무 스승 두런두런, 거기 우뚝한 것을 *

*고재종시집[쪽빛 문장]-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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