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한용운 시 모음

효림♡ 2008. 8. 1. 07:56

*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나를 흙발로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 사랑하는 까닭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 복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

 

* 약사암 가는 길에  

십리도 반나절쯤 구경하며 갈만도 하니

구름 속 오솔길이 이리도 그윽한 줄이야

시내따라 가노라니 물도다한 곳

꽃도 없는데 숲에서 풍겨오는 아, 산의 향기여 *

 

* 찬송(讚頌)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鍛鍊)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바다에 봄바람이여 *
 

 

* 낙원(樂園)은 가시덤불에서 
죽은 줄 알았던 매화나무 가지에 구슬 같은 꽃망울을 맺혀주는 쇠잔한 눈 위에 가만히 오는 봄 기운은 아름답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밖에 다른 하늘에서 오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모든 꽃의 죽음을 가지고 다니는 쇠잔한 눈이 주는 줄을 아십니까.

구름은 가늘고 시냇물은 옅고 가을산은 비었는데 파리한 바위 사이에 실컷 붉은 단풍은 곱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풍은 노래도 부르고 울음도 웁니다. 그러한 '자연(自然)의 인생(人生)'은 가을 바람의 꿈을 따라 사라지고

기억(記憶)에만 남아 있는 지난 여름의 무르녹은 녹음(綠陰)이 주는 줄을 아십니까.


일경초(一莖草)가 장육금신(丈六金身)이 되고 장육금신(丈六金身)이 일경초(一莖草)가 됩니다.
천지(天地)는 한 보금자리요 만유(萬有)는 같은 소조(小鳥)입니다.
나는 자연(自然)의 거울에 인생(人生)을 비춰 보았습니다.
고통(苦痛)의 가시덤불 뒤에 환희(歡喜)의 낙원(樂園)을 건설(建設)하기 위하여 님을 떠난 나는 아아 행복(幸福)입니다. *

* 고규홍저[나무가 말하였네]-마음산책 

 

* 거문고 탈 때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기는 근심을 잊을까 함이려니 

춤곡조가 끝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밤은 바다가 되고 거문고줄은 무지개가 됩니다 

거문고 소리가 높았다가 가늘고

가늘다가 높을 때에 당신은 거문고줄에서 그네를 뜁니다

마지막 소리가 바람을 따라서 느티나무 그늘로 사라질 때에

당신은 나를 힘 없이 보면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아아 당신은 사라지는 거문고 소리를 따라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 인연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안합니다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리입니다

 

잊어야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땐 잊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때 돌아보지 않는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그 만큼 그 사람을 못 잊는 것이요
그 만큼 그 사람과 사랑했다는 것이요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초이며 이별의 시달림입니다

  
떠날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가다가 달려오면
사랑하니 잡아달라는 것이요
가다가 멈추면
다시 한번 더 보고 싶다는 것이요
뛰다가 전봇대에 기대어 울면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 無題 

 

桑楡髮己短   葵藿心猶長 - 상유발기단 규곽심우장 

 늙은 나이라 머리칼 짧아지고 해바라기 닮아서 마음은 장하다

 

山家雪未消  梅發春宵香 - 산가설미소 매발춘소향 

산집엔 눈이 아직 녹지 않았는데 매화꽃 피어 봄밤이 향기롭다 

 

 

* 自由花

山鸚鵡能言語 
愧我不及彼鳥多 
雄辯銀兮沈默金 
此金買盡自由花 

 

* 옥중에서 읊는다 
농산의 앵무새는 말을 곧잘 하느니  
그 새만도 훨씬 못한 이 몸 부끄러워라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일 바엔 
이 금으로 자유의 꽃 몽땅 사고자

 

* 한용운(韓龍雲)시인

-호 : 만해(萬海 ·卍海), 한국의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1879~1944 충남 홍성 출생,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주요저서- [조선불교유신론][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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