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월식 - 김명수

효림♡ 2009. 3. 31. 08:12

* 월식(月蝕) - 김명수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국 성큼

성큼

남겨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

 

* 개미

개미는 허리를 졸라맨다

개미는 몸통도 졸라맨다

개미는 심지어 모가지도 졸라맨다. 

나는 네가 네 몸뚱이보다 세 배나 큰 먹이를

끌고 나르는 것을 여름 언덕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네 식구들과 한가롭게 둘러앉아

저녁 식탁에서 저녁을 먹는 것을 본 적 없다.

너의 어두컴컴한 굴속에는 누가 사나?

햇볕도 안 쬐 허옇게 살이 찐 여왕개미가 사나? *

 

* 구름 사다리

구름 사다리, 구름 사다리

구름 위로 솟아 있고

누가 부축하나 구름 사다리

염소와 강아지가 부축해주고

누가 짜 올리나 구름 사다리

가랑잎과 풀벌레가 짜서 올리고

맑은 노래 숨결은 타고 올라라

고운 노래 숨결은 타고 올라라 *

 
* 들국화와 뱀
이른 아침 서리 내려

향기 맑은 들국화 호젓이 피어 있는

외진 산모롱이

 

선정(禪定)에 들듯 저 뱀은

들국화 더미 속을 찾아드는데

들국화 고요히 길을 열어주고 있다

 

유정(有情)도 무정(無情)도 하나가 되는

서리꽃 사라진

외진 모퉁이 *

 
* 가오리
바다에 들어 모래알//

헤아리기 곤비로운 날//

바람 한 점 없는 곳에 바람이 인다//

무국적(無國籍)은 이따금//

얼마나 다행인가//

다시마도 미역도 너울거리고//

거기 등기권리증도 없는 밤//

가오리의 심해(深海) * 

* 하급반 교과서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

 

* 세우(細雨)


난장이 兵丁들은
소리도 없이 보슬비를 타고
어디서 어디서 내려오는가

시방 곱게 잠이 든
내 누이
어릴 때 걸린 小兒麻痺로
下半身을 못쓰는

내 누이를

꿈결과 함께 들것에 실어
소리도 없이
아주 아늑하게


魔法의 城으로 실어가는가 *

 

* 우리나라 꽃들엔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 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

 

* 발자국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주었네 *

* 김명수시집[바다의 눈]-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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