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식(月蝕) - 김명수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국 성큼
성큼
남겨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
* 개미
개미는 허리를 졸라맨다
개미는 몸통도 졸라맨다
개미는 심지어 모가지도 졸라맨다.
나는 네가 네 몸뚱이보다 세 배나 큰 먹이를
끌고 나르는 것을 여름 언덕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네 식구들과 한가롭게 둘러앉아
저녁 식탁에서 저녁을 먹는 것을 본 적 없다.
너의 어두컴컴한 굴속에는 누가 사나?
햇볕도 안 쬐 허옇게 살이 찐 여왕개미가 사나? *
* 구름 사다리
구름 사다리, 구름 사다리
구름 위로 솟아 있고
누가 부축하나 구름 사다리
염소와 강아지가 부축해주고
누가 짜 올리나 구름 사다리
가랑잎과 풀벌레가 짜서 올리고
맑은 노래 숨결은 타고 올라라
고운 노래 숨결은 타고 올라라 *
* 들국화와 뱀
이른 아침 서리 내려
향기 맑은 들국화 호젓이 피어 있는
외진 산모롱이
선정(禪定)에 들듯 저 뱀은
들국화 더미 속을 찾아드는데
들국화 고요히 길을 열어주고 있다
유정(有情)도 무정(無情)도 하나가 되는
서리꽃 사라진
외진 모퉁이 *
* 가오리
바다에 들어 모래알//
헤아리기 곤비로운 날//
바람 한 점 없는 곳에 바람이 인다//
무국적(無國籍)은 이따금//
얼마나 다행인가//
다시마도 미역도 너울거리고//
거기 등기권리증도 없는 밤//
가오리의 심해(深海) *
* 하급반 교과서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
* 세우(細雨)
저
난장이 兵丁들은
소리도 없이 보슬비를 타고
어디서 어디서 내려오는가
시방 곱게 잠이 든
내 누이
어릴 때 걸린 小兒麻痺로
下半身을 못쓰는
내 누이를
꿈결과 함께 들것에 실어
소리도 없이
아주 아늑하게
魔法의 城으로 실어가는가 *
* 우리나라 꽃들엔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 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
* 발자국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주었네 *
* 김명수시집[바다의 눈]-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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