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난(蘭) - 박목월

효림♡ 2009. 4. 2. 08:33

* 난(蘭) - 박목월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 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백국(白菊)  

나이 五十

잠이 맑은 밤이 길어진다.

머리맡에 울던 귀뚜라미도

자취를 감추고.

네 방구석이 막막하다. * 

 

* 하선(夏蟬)

올 여름에는 매미 소리만 들었다.

한 편의 시(詩)도 안 쓰고

종일 매미 소리만 듣는 것으로

마음이 흡족했다.

知天命

아침나절을

발을 씻고 대청(大廳)에 오르면

찬 물을 자아 올리는

매미 소리.

마음이 가난하면

세상에 넘치고

어느것 하나 허술한 것이 없는

저 빛나는 잎새

빛나는 돌덩이.

누워서 편안한 대청(大廳)에서

씻은 발에

흐르는 구름.

잠이나 자야지.

낮에도

반 쯤 밤으로

귀를 잠그고.

이 무료한 안정(安定)

너무나 충만하다

나무는 굵어질수록 우둔(愚鈍)한 것을

잠이나 자자.

地心에 깊이 뿌리를 묻고

종일

오금(烏金)의 날개를 부벼대는

매미 소리를 듣는 것으로

마음이 흡족했다.

 

* 적막한 식욕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식성(食性).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손과 주인이 겸상을 하고
산나물을
곁들여 놓고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너고
저승을 갈 때,
보이소 아는 양반 앙인기요
보이소 윗마을 이생원 앙인기요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절로 젓가락이 가는
쓸쓸한 식욕. *

* 정끝별의 밥시이야기[밥]-마음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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