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세상의 등뼈 - 정끝별

효림♡ 2009. 4. 10. 22:41

* 세상의 등뼈 -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

* 정끝별시집[와락]-창비

 

* 입동

이리 홧홧한 감잎들

이리 분분히 소심한 은행잎들

이리 낮게 탄식하는 늙은 후박잎들

 

불꽃처럼 바스라지는

요 잎들 모아

서리 둔 마음에 담아두어야겠습니다

 

몸속부터 꼬숩겠지요 *

 

* 밥이 쓰다 
파나마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

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

 

* 밀물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

 

* 아슬아슬

죽어가는 별이 무거워지는 이유

무거워진 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무주(無主) 변두리로 달려가는 이유

변두리의 별이 더이상 빛을 내지 않는 이유

죽어가는 별을, 내가 사랑하는 이유

 

사랑이 빛을 잃었다면

그건 죽어가는 별처럼 무거워졌기 때문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음의 무주로 달려갔기 때문

빛을 잃은 것들은 잊히기 마련인 것이라서

 

새파란 새벽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명왕성 너머로 달려가는

자작나무 가지 끝에 걸린 저 별

 

이를 수 없는 별은 많지만

잊힐 수 없는 별은 많지 않다 *

* 정끝별시집[와락]-창비

 

* 여여  

자욱한 당신 눈빛을 바라볼 때마다

샹그릴라 만년설을 떠올리곤 했는데

오랜 두절 후 보낸 편지 말미에 붙은

여여(如如)라는 말

주문처럼 내 입에 붙어버린 여여

여여라 되뇔 때마다

입 안 저 속부터 무궁무진 울려나는

뱃속에서 주고받던 입말의 옹알리

저기 정한수 앞에 엎드린 엄마의 비나리

백수광부를 불렀던 공후인의 노랫가락

저기 저것, 삼신할미가 남기고 간 발자국 소리

본래 여여 그대로 여여

그게 다 여자 입에 고여 있었다니

몸속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강물처럼

바람에게 남긴 마지막 고수레처럼

지금 여기의 여여 이순간의 여여

한 눈사나이가 가고 한 눈사나이가 오는 사이

한 세기의 레일이 깔리고 묻히는 사이

여여에 깃든 샹그릴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푸르스름한 내 아들

당신도 여여하신가요? *

* 정끝별시집[와락]-창비

 

*
크나큰 잠 

한자리 본 것처럼
깜빡 한여기를 놓으며
신호등 앞에 선 목이 꽃대궁처럼 꺾일 때
사르르 눈꺼풀이 읽던 행간을 다시 읽을 때

봄을 놓고 가을을 놓고 저녁마저 놓은 채
갓 구운 빵의 벼랑으로 뛰어들곤 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사과냄새 따스한
쏘파의 속살 혹은 호밀빵의 향기
출구처럼 다른 계절과 다른 바람과 노래

매일 아침 길에서 길을 들어설 때
매일 저녁 사랑에서 사랑을 떠나보낼 때
하품도 없이 썰물 지듯
깜빡깜빡 빠져나가는 늘 오늘

깜빡 한소식처럼
한지금을 깜빡 놓을 때마다
한입씩 베어먹는 저 큰 잠을 향해
얼마나 자주 둥근 입술을 벌리고만 싶은가

벼락치듯 덮치는 잠이 삶을 살게 하나니
부드러워라 두 입술이 불고 있는 아침의 기적
영혼의 발끝까지 들어올리는 달콤한 숨결
내겐 늘 한밤이 있으니
한밤에는 저리 푹신한 늘 오늘이 있으니 *
* 2008년[소월시문학상]대상 수상작

* 정끝별시집[와락]-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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