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춘분지나 - 정끝별

효림♡ 2009. 4. 10. 22:42

* 춘분지나 - 정끝별 

고삐 풀린 망아지가 달려간다 너도 달려간다 봄이라잖니!
 
나를 빠져나와 달려가는 바보야, 바다를 빠져나온 강이 처음 바다로
달려가잖니, 새도 처음 둥지로 달려가잖니!
 
박차고 달려가기만 하는 철부지야, 아침 해는 하루도 빠짐없이 잠망
경처럼 불쑥불쑥 되돌아오잖니, 들뜬 뿌리도 씨앗을 터뜨리기 위해 여
린 꽃대를 밀고 또 밀고 있잖니, 이 철부지야!
 
아직도 너를 부르고 있는 내가 있잖니, 달려가는 강물에 저리 순한
이랑을 불러내는 안 보이는 바람이 있잖니!
 
날 이기고도 넌 울며 달려가고 네게 지고도 난 이렇게 웃고 서 있잖
니, 사랑이라잖니!
 
바짝바짝 한낮이 길어지고 있잖니, 봄 사자 코털을 건드리고 내달리
는 때 이른 사춘기라잖니, 이제 어쩐다니! *

 

* 처서  
모래내 천변 오동가지에 

 
맞댄 두 꽁무니를
포갠 두 날개로 가리고
사랑을 나누는 저녁 매미

 

단 하루
단 한 사람
단 한 번의 인생을 용서하며
제 노래에 제 귀가 타들어가며 

 
벗은 옷자락을 걸어놓은
팔월도 저문 그믐

 
멀리 북북서진의 천둥소리 *

* 정끝별시집[와락]-창비

 

* 살구꽃이 지는 자리 
바람이 부는 대로
잠시 의지했던 살구나무 가지 아래
내 어깨뼈 하나가 당신 머리뼈에 기대 있다
저 작은 꽃잎처럼 사소하게
당신 오른 손바닥뼈 하나가 내 골반뼈 안에서
도리없이 흩어지고 있다

꽃 진 자리가 비어간다
살구 가지 아래로 부러진 내 가슴뼈들이
당신 가슴뼈를 마주보며 꽃 핀 자리
한 잎 뺨 한 잎 입술 한 잎 숨결
지는 꽃잎도 저리 인연의 자리로 쌓이고
문득 바람도 피해간다

누구의 손가락뼈인지
묶였던 매듭을 풀며 낱낱이 휘날리고 있다

하얗게 얼룩진 꽃 그늘 아래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부쳐준 오래된 편지 한 장을 읽으며 

 

* 어떤 자리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를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 열매가 익어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는 나의 것이었는데
어느 날 순식간에 모과가 사라졌다
내 눈맞춤이 모과 꼭지를 숨막히게 했을까
내 눈독(毒)이 모과 살을 멍들게 했을까
처음부터 모과는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모과는 사라졌고 진눈깨비가 내렸다
젖은 가지 끝으로 신열이 올랐다
신음 소리가 났고 모과는 사라졌고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에 주먹만한 허공이 피었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를 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모과는 여전히 나의 것이건만
모과 즙에 닿은 눈시울이 아리다
모과가 떨어진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차연(次緣)의 슬픔
이 사랑의 배후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불선여정(不宣餘情) 
쓸 말은 많으나 다 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편지 말미에 덧붙이는 다 오르지 못한 남은 계단이라 하였습니다

꿈에 돋는 소름 같고 입 속에 돋는 혓바늘 같고 물낯에 돋는 눈빛같이 미처 다스리지 못한 파문이라 하였습니다

나비의 두 날개를 하나로 접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마음을 안아 겹이라든가 그늘을 새기고 아침마다 다른 빛깔을 펼쳐내던

두 날개, 다 펄럭였다면 눈멀고 숨 멎어 가라앉은 돌이 되었을 거라 하였습니다

불쑥 끼어든 샛길들목에서 저무는 점방(店房)처럼 남겨지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봉인된 이후로도 노을을 노을이게 하고 어둠을

어둠이게 하며 하염총총(何念悤悤) 하염총총 저리 수북한 바람을 때맞춰 때늦은 바람이게 하는 지평선의 목메임이라 하였습니다

때가 깊고 숨이 깊고 정이 깊습니다
밤새 낙엽이 받아낸 아침서리가 소금처럼 와 앉았습니다 갈바람도 갈앉아

불선여정 불선여정 하였습니다 

 

* 와락

반 평도 채 못되는 네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

불후의 입술

천번을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

 

헐거워지는 너의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자락 *

* 정끝별시집[와락]-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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