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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의 부족(不足)입니다 - 고은

효림♡ 2009. 4. 30. 08:19

* 사랑은 사랑의 부족(不足)입니다 - 고은   

5월이었습니다 그다음 6월이었습니다

석곡대 석곡 꽃송이 피어왔습니다

더 가노라면

잔 어수리 흰 꽃들 피어왔다 피어갔습니다

 

이런 날인데요

해설피

바람 을스산스럽습니다

 

 

이제야 가만가만 알아버렸습니다

 

세상은

세상의 부족(不足)입니다

사랑은 자못

사랑의 부족입니다

 

나 어쩌지요

 

수십 년 전 그날로

오늘도 나는 감히 사랑의 떨려오는 처음입니다

다리미질 못한 옷 입고

벌써 이만큼이나 섣불리 나선

S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허나 나 아직도 이 세상 끝 사랑을 잘 모르고 가기만 하며 갑니다 *

 

* 열매 몇 개

지난 여름내
땡볕 불볕 놀아 밤에는 어둠 놀아
여기 새빨간 찔레 열매 몇 개 이룩함이여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여물었나니 * 

 

* 꽃보다 먼저  

아기 노루귀 꽃 아직 멀었니?

산수유 열흘 굶은 가지

너 산수유 꽃도 아직 멀었니?

 

손 시려라

손 시려라

 

지금 어린 날벌레 한 녀석이 먼저 큰 봄을 가지고 오시누나. *

* 고은시집[허공]-창비

 

* 길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

 

* 강설(降雪) 

폐허(廢墟)에 눈 내린다
적(敵)도 동지(同志)도
함께 모이자
함께 눈을 맞자
눈 맞으며 껴안고 울자
폐허(廢墟)에 눈 내린다
우리가 1950년대에 깨달은 것은

인산인해(人山人海)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모든 죽은 사람들까지도 살아나서

함께 눈을 맞자
눈 맞으며 울자
우리는 분명 죄(罪)의 족속(族屬)이다
눈을 맞자
눈 맞으며 사랑하자 *

 

* 폐결핵 

1

누님이 와서 이마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 하이드라지드병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木蓮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 번의 긴 숨이 창 너머 하늘로 삭아가버린다.

오늘, 슬픈 하루의 오후에도

늑골(肋骨)에서 두근거리는 신(神)이

어딘가의 머나먼 곳으로 간다.

지금은 거울에 담겨진 기도와

소름조차 말라버린 얼굴

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 

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

한 겨를의 실크빛 연애에도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을

누님이 그렇게 보고 있다.

언제나 오는 것은 없고 떠나는 것뿐 

누님이 치마 끝을 매만지며

화장 얼굴의 땀을 닦아내린다 

 

2

형수는 형의 얘기를 해준다.

형수의 묵은 젖을 빨으며

고향의 병풍(屛風) 아래로 유혹된다.

그분보다도 이미 아는 형의 반생애,

나는 차라리 모르는 척하고 눈을 감는다.

항상 기(旗) 아래 있는 영웅이 떠오르며

그 영웅을 잠재우는 미인이 떠오르며

형수에게 넓은 농지에 대하여 물어보려 한다.

내가 창조한 것은 누가 이을까.

쓸쓸하게 고개에 녹아가는

눈허리의 명암(明暗)을 씻고 그분은 나를 본다.

작은 카나리아 핏방울을 혀에 구을리며

자고 싶도록 밤이 간다.

내가 자는 것만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형의 사후를 잊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끝이 또 하나 지나가는가.

형수는 밤의 부엌 램프를

내 기침 소리에 맡기고 간다. *

 

* 선제리 아낙네들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칫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 리 길 한밤중이니

십 리 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하지

어느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 *

* 고은시집[고은-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문학사상사

 

* 순간의 꽃 

다시 한번 폭발하고 싶어라
불바다이고 싶어라
한라산 백록담

고군산 선유도 낮은 수평선
해가 풍덩 진다
함부로 슬퍼하지 말아야겠다

소가 운다
송아지가 운다
그 오랜 사랑을 사람이 흉내 낸다

걸어서 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 *

 

* 순간의 꽃

실컷

태양을 쳐다보다가 소경이 되어버리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그대를 사랑하다며 나를 사랑하였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시궁창 미나리밭 밭머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

* 순간의 꽃 中에서

 

* 어떤 기쁨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했던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하고 있는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막 생각하려는 것

울지 마라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세계에서

이 세계의 어디에서

나는 수많은 나로 이루어졌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수많은 남과 남으로 이루어졌다

울지 마라

* 고은시집[오십 년의 사춘기]-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