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조병화 시 모음

효림♡ 2009. 5. 14. 08:39

*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

 

* 구름 

너는 발이 없구나 * 

 

* 내일 

걸어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날개로 다는 날 수 없는 곳에

하늘이 있었습니다

 

꿈으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내일이 있었습니다 *

 

* 편지

달 없는 밤 하늘은

온통 별들의 장날이었습니다 *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나

 

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 헤어진다는 것은 
맑아지는 감정의 물가에 손을 담그고
이슬이 사라지듯이
거치러운 내 감정이 내 속으로
깊이 사라지길 기다렸습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ㅡ나도 나하고 헤어질 이 시간에

해와 달이 돌다 밤이 내리면
목에 가을 옷을 말고
ㅡ이젠 서로 사랑만 가지곤 견디지 못합니다
ㅡ그리워서 못 일어서는 서로의 자리올시다

슬픈 기억들에 젖는 사람들

별 아래 밤이 내리고 네온이 내리고
사무쳐서 모이다 진 자리에 마음이올시다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ㅡ나도 나하고 헤어질 이 시간에 *

*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책만드는집
 

* 사랑은  

사랑은 아름다운 구름이며

보이지 않는 바람

인간이 사는 곳에서

돈다

 

사랑은 소리나지 않는 목숨이며

보이지 않는 오열

떨어져 있는 곳에서

돈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

받아도 받아도 모자라는

목숨

 

사랑은 닿지않는 구름이며

머물지 않는 바람

차지 않는 혼자 속에서

돈다                     

 

* 매미

매미가 이산 저산 이 나무 저 나무에서
온종일 울어댄다

인류의 종말을 예언이나 하듯이
생명을 가진 온갖들에게 마지막 인사나 하듯이
맴맴맴맴맴맴맴 맴맴맴맴맴......
온 몸 다 태우며 뜨겁게 뜨겁게
하늘을 태운다

맴맴맴 맴맴맴 맴맴맴맴맴맴맴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지구는 그저 부패해가며
인간은 그저 황폐해가며
이산 저산 이 나무 저 나무에서
매미는 맴맴맴맴맴맴 맴맴맴맴맴맴
스스로를 태운다

따갑게

 

* 소라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 가을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

 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 야생화(野生花) 

네가 작게 잡풀에 가려져 있다해서

신이 어찌 너의 이름을 잊으시겠는가

다 제 자리 자리에서 잘 피어 있는 것을

 

모두 제 자리 자리에서

신께서 나눠주신 목숨 잘 키우고 있는 것을

신의 보살핌은 한낱 같으신 것을

신의 사랑은 한낱 평등하신 것을

 

네가 큰 잡풀에 가려져 작게 있다고 해서

어찌

어진 신께서 너의 이름을 잊으시겠는가

 

사람도 *

 

* 들꽃처럼

들을 걸으며
무심코 지나치는 들꽃처럼
삼삼히 살아갈 수는 없을까

 

너와 내가 서로 같이
사랑하던 것들도
미워하던 것들도
작게 피어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삼삼히 흔들릴 수는 없을까

눈에 보이는 거 지나가면 그 뿐
정들었던 사람아
헤어짐을 아파하지 말자

들꽃처럼
들꽃처럼
실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삼삼히 그저 삼삼히 
 

 

*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나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 신년시(新年詩)
흰 구름 뜨고
바람 부는
맑은 겨울 찬 하늘
그 無限을 우러러보며
서 있는
大地의 나무들처럼

 

오는 새해는
너와 나, 우리에게
그렇게 꿈으로 가득하여라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영원한 日月의 영원한
이 回轉 속에서

 

너와 나, 우리는
約束된 旅路를 동행하는
有限한 生命


오는 새해는
너와 나,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으로 더욱더
가까이 이어져라

 

* 고독하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았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

 

*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

 

* 남남 27

네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했다
그 기쁨이었으면 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지닌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번뇌라든지, 일상의 그 아픔을
맑게 닦아 낼 수 있는 네 그 음악이었으면 했다
산지기가 산을 지키듯이
적적한 널 지키는 적적한 그 산지기였으면 했다
가지에서 가지로
새에서 새에로
꽃에서 꽃에로
샘에서 샘에로
덤불에서 덤불로
골짜기에서 골짜기에로
네 가슴의 오솔길에 익숙턴
충실한 네 산지기였으면 했다
그리고 네 마음이 미치지 않은 곳에
둥우릴 만들어
내 눈물을 키웠으면 했다
그리고 네 깊은 숲에
보이지 않는 상록의 나무였으면 했다
네게 필요한, 그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

 

* 지루함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지루할거다

그 기다림이 너무나 먼

인생은 또한 지루할거다

그 기다림이 오지 않는 인생은

더욱 더 지루할거다

 

지루함을 이겨내는 인생을 살려면

항상 생생히 살아있어야 한다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그 무엇을 스스로 찾고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산다는 걸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모습을
항상 보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 길

길은 영원한 노스탤지어

너는 어느 길을 가고 있는가

 

지금쯤 *

 

* 편편화심

꽃이 지누나
기다려도 무심한 봄날
봄이 무거워 꽃이 지누나
진관사 가는 언덕
훨훨 날리는 꽃
꽃은 피어도 님 없는 봄날
꽃이 지누나
봄이 무거워 꽃이 지누나
세상에 한번 피어
가는 날까지 소리 없는 자리
님 그리다 마는 자리 *
 

 

* 조병화(趙炳華)시인

-1921~2003 경기도 안성 사람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 발간, 1960년 아시아 자유문학상,1974년 한국시인협회상,198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시집 [오산 인터체인지][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따뜻한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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