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문태준 시 모음 2

효림♡ 2009. 5. 13. 08:09

* 매화나무의 해산(解産) - 문태준  

늙수그레한 매화나무 한 그루
배꽃 같은 꽃 피어 나무가 환하다
늙고 고집 센 임부의 해산 같다
나무의 자궁은 늙어 쭈그렁한데
깊은 골에서 골물이 나와 꽃이 나와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
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

 

* 배꽃 고운 길 
봄이 되면 자꾸 세상이 술렁거려 냄새도 넌출처럼 번져가는 것이었다
똥장군을 진 아버지가 건너가던 배꽃 고운 길이 자꾸 보이는 것이었다
땅에 묻힌 커다란 항아리에다 식구들은 봄나무의 꽃봉오리처럼 몸을 열어 똥을 쏟아낸 것인데
아버지는 봄볕이 붐비는 오후 무렵 예의 그 기다란 냄새의 넌출을 끌고 봄밭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곤 하얀 배밭 언덕 호박 자리에 그 냄새를 부어 호박넌출을 키우는 것이었다
봄이 되면 세상이 술렁거려 나는 아직도 봄은 배꽃 고운 들길을 가던 기다란 냄새 넌출 같기만 한 것이었다 *

 

* 배꽃 고운 길       
얘들아, 바소쿠리 뗀 알지게에 장군 하나 얹고 꽃배달 가자. 아 글쎄 요 폭 삭은 냄새를 장군 택배로 부치면 꽃이 된다누나. 뿌리 께 출렁거리는 냄새를 부리면 천 개의 가지마다 꽃으로 당도한다누나. 히히, 아들놈, 여편네 끙끙 인상 쓰며 퍼지른 고민들이 글쎄 흰 배꽃이 되어 온다누나. 늙은 배나무 둘레에도 둥근 달무리를 파고 출렁거리는 꽃물 붓자꾸나

옛날, 밤마실 갔다가도 아랫배 묵직하면 제 집 뒷간으로 달려오던 농부들 있었단다. 장군도 항아리도 없는 이 도시여, 날마다 어디로 떠내려가나. 우리들 아까운 꽃잎이 콰르르- *

 

* 슬픈 샘이 하나 있다  

맹꽁이가 운다
비를 두 손으로 받아 모으는 늦여름 밤
맹꽁이는 울음주머니에서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를 가졌다


나는 내가 간직한 황홀한 폐허를 생각한다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 
흉측한 웅덩이


가슴속에 저런 슬픈 샘이 하나 있다 

 

* 불만 때다 왔다
앓는 병 나으라고
그 집 가서 마당에 솥을 걸고 불만 때다 왔다
오고 온 병에 대해 물어 무엇 하리
지금 감나무 밑에 감꽃 떨어지는 이유를
마른 씨앗처럼 누운 사람에게
버들 같은 새살은 돋으라고
한 계절을 꾸어다 불만 때다 왔다 *

 

* 빈집

주인도
내객(來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집 *

                       

* 수련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얼음이 얼듯 수련은 누웠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골똘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바퀴가 물위를 굴러가네 *

 

* 한 호흡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 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

 

*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 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 일가(一家)
귀뚜라미 한마리가 내 방에 찾아왔네.
사실은 내가 귀뚜라미를 불러들였지.
과일이 썩으면서 벌레를 불러들이듯이.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어제보다 훨씬 커졌지.
내 이(齒)가 다 시릴 정도였으니.
새벽녘 한참을 울 적엔
서로에게
마치 엉성하게 쌓인 돌담이라도 되어
너도 나도
더는 갈 곳 없어
더는 갈 곳 없이
서로에게
받힌 돌처럼 앉아서. * 

 

* 시월에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헤죽,헤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 강처럼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 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결리는 그런 가을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 묵언(默言)  

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 그 맘 때에는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 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보았다
빈 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 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 맘 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 맘 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 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 황새의 멈추어진 발걸음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 흙물이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

그는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

한 획 필체로 우레와 침묵  사이에 그는 있다

 

* 찰나 속으로 들어가다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
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
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
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
나는 이 모든 찰나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 서리   

겨울 찬 하늘 한 켜 살껍질을 누가 벗겼나 

어느 영혼이 지난밤 꽃살문 같은 꿈을 꾸었나 

갓 바른 문풍지 같고 공기로만 빚은 동천産 첫물 

사락사락 조리로 쌀을 이는 소리가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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