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정일근 시 모음

효림♡ 2009. 5. 11. 08:28

* 쪽빛 - 정일근  

하늘이 바다를 만날 때

바다가 먼저 물드는 색깔

바다가 사람을 만날 때 

람이 먼저 물드는 색깔

사람이 사랑을 만날 때

사랑이 먼저 물드는 색깔


* 어머니의 수틀 

달빛을 길어 오고 강물 또한 놓아 보낸

어머니의 수틀 속에 한 세상이 넉넉하다

조용히 귀 기울이면 바람소리 물소리

남루며 시름들을 한 땀 한 땀 다스리며

전 생애 경영하는 쪽빛 비단 열두 폭에

잔잔한 손길로 새긴 순명의 세상살이

수틀 속 길을 따라 맨발로 걷는 새벽

견고한 욕망의 껍질 겸허히 풀어지고

무욕의 손길에 젖어 마음 모두 비워지고

 

*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섞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 정일근시집[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문학사상사

 
* 제주에서 어멍이라는 말은
따뜻한 말이 식지 않고 춥고 세찬 바람을 건너가기 위해
제주에선 말에 짤랑짤랑 울리는 방울을 단다
가령 제주에서 어멍이라는 말이 그렇다
몇 발짝 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어머니라는 말에
어멍이라는 말의 방울을 달면
돌담을 넘어 올레를 달려 바람을 건너
물속 아득히 물질하는 어머니에게까지 찾아간다
어멍.....,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나
ㅇ 이라는 바퀴 제 몸 때리듯 끝없이 굴리며
그리운 것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저 숨비소리 같은 것 *

 
* 봄 도다리
입춘 지나 왕 벚꽃 꽃망울
눈 비비다 꽃눈 빨갛게 뜰 때
진해 용원 앞 바다 도다리는
덩달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추운 겨울 몸 하나로 견디면서
봄이 오길 간절히 기다려
땅에서 피는 꽃이 있다면
바다에서 피는 꽃은 있느니
제 뼛속 붉은 피 끓여
제 살 속에 꽃 피우며
봄을 기다리는 봄 도다리 있다
그놈들 뼈째로 썰어 씹다가
입 속에서 펑펑 터지는 바다 꽃
그 꽃 소식을 알지 못한다면
당신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 목련

나비 날개 같은 부드러운 오수에 빠진 봄날  오후
창문 아래 사월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누군가 사랑의 전화 버턴을 꼭꼭 누루고 있다
뜨거운 목소리 앚혀진 첫사랑의 귓불을 간지럽히고
화사한 성문이 잠든 몸을 깨워 열꽃의 뜸을 놓는다
누구일까. 저렇게 더운 사랑을 온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내려다 보니 없다 아무도 없는 봄날 오후를 배경으로
담장안의 목련만이 저홀로 터지고 있다
 

 

* 자벌레 의자

나뭇잎 갉아먹고 자벌레
한 뻠 두 뻠 헤아리며
나뭇가지 위를 재며 간다
추석이 몇 밤 남았는지
설날이 몇 밤 남았는지
자기 전에 한 밤 두 밤 세 밤
세다 잠든 어린 손가락처럼
자벌레 날개 돋는 날이
날개 달고 날아갈 날이
이제 며칠이나 남았는지
제 몸을 손가락 삼아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자로 재며 기어간다

 

* 홍시
양산 신평장 지나다 홍시장수 만났네
온전한 몸으로 늦가을에 당도한 감의 생애는
붉은 광채의 詩처럼 눈부셨네
신평은 아버지 감꽃 같은 나이에 중학을 다니셨던 곳
그러나 아버지의 생 너무 짧아
붉게 익기도 전에 떨어져버린 풋감이었네
헤아려보니 아버지 살아 계셨으면 올해 甲年
홍시를 좋아하실 연세, 드릴 곳 없는 홍시 몇 개 사며
감빛에 물들어 눈시울 자꾸 붉어졌네

 

* 木蓮

이사온 안방에 신혼시절 쓰던 은은한 목련꽃 같은 공단 솜이불 깔며 아내는 이제 여기에 뿌리내려 살자고 속삭인다
바람 같은 생에 뿌리 내려 살기 위해서 銀峴里 마당에 목련나무 두 그루 심어놓고 아직은 먼 봄을 기다린다

* 겨울 새벽에
시인의 아내는 겨울에 눈이 밝아진다
봄 여름 가을에는 잘 보지 못했던
곳집이 비는 것이 눈에 환히 보이는 모양이다
새벽 추위에 우리는 함께 잠을 깨
아내는 사위여가는 겨우살이를 헤아리고
나는 시를 생각한다

시인의 가난은 추운 날을 골라서 찾아온다
보일러 기름도 추운 날 새벽을 골라 똑 떨어지듯이

 

* 부석사 무량수                       
어디 한량없는 목숨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무량수(無量壽)를 산다면
이 사랑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짤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 정일근시집[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시와시학사

 

* 슬픔, 그때 

종일 한 잔의 물로 그 슬픔 견뎠는데

밤에는 잠들었다 깨었다 하며

열 통의 피오줌을 누었다

 

그 하룻밤 사이 내 얼굴 군홧발로 짓밟고

세월 천년이 뚜벅뚜벅 지나갔다

 

* 꽃길

풀이 무성하여

칼이 무성하여

여름과 여름 사이

그곳엔 길이 없는데

저 푸른 벽에

저 푸른 절벽에

뱀이

꽃뱀이 길을 낸다

밟고 가면 땅의 상처로 남는

사람의 길 아니라

꽃뱀이 제 몸으로 쓰는

일필휘지의 길

녹음방초 그늘 아래

순식간에 피웠다가

흔적 없이 거둬들이는

꽃길 꽃

 

* 길 -경주 남산 

 마음이 길을 만드네
그리움의 마음이 없다면
누가 길을 만들고
그 길 지도 위에 새겨놓으리

보름달 뜨는 저녁

마음의 눈도 함께 떠

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

산이 사람에게 풀어 놓은 실타래 같은 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

눈을 감고서도 찾아 갈 수 있는 길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그 길 따라 내가 가네. *
 

 

* 갈림길 

                                                                

 

* 흑백사진 - 7월

내 유년의 7월에는 냇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르고

또 그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내려와 어린 눈동자 속 터져나갈 듯 가득 차고

찬물들은 반짝이는 햇살 수면에 담아 쉼 없이 흘러갔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착한 노래들도 물고기들과 함께

큰 강으로 헤엄쳐 가버리면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은

미루나무 손들을 흔들어 차르르차르르 내 겨드랑에도 간지러운 새잎이 돋고

물 아래까지 헤엄쳐가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로

삐뚤삐뚤 헤엄쳐 달아나던 미루나무 한 그루.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미루나무야

귀에 들어간 물을 뽑으려 햇살에 더워진 둥근 돌을 골라 귀를 가져다 대면

허기보다 먼저 온몸으로 따뜻하게 퍼져오던 따뜻한 오수

점점 무거워져 오는 눈꺼풀 위로 멀리 누나가 다니는 분교의 풍금소리 쌓이고

미루나무 그늘 아래에서 7월은 더위를 잊은 채 깜박 잠이 들었다

 

* 날아오르는 산  

영축산은 영락없는 독수리 형상이다.

날개 크게 펼쳐 하늘 허공을 돌며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 저 거침없는 몰입의 긴장을

나는 느낀다, 무진장 무진장 눈이라도 퍼붓는 날이면

흰 날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이고

산의 들숨날숨 따라가다 나도 함께 숨을 멈추고 만다.

명창의 한 호흡과 고수의 북 치는 소리 사이

그 사이의 짧은 침묵 같은, 잠시라도 방심한다면

세상 꽉 붙들고 있는 모든 쇠줄들

한순간에 끊어져 세차게 퉁겨 나가버릴 것 같은,

팽팽한 율에 그만 숨이 자지러지는 것이다.

겨울산을 면벽 삼아 수좌들 동안거에 들고

생각 놓으면 섬광처럼 날아와 눈알 뽑아버릴

독수리 한 마리 제 앞에 날려 놓고

그도 물잔 속의 물처럼 수평으로 앉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잔 속의 물 다 쏟고 마는

그 자리에 내 시를 들이밀고, 이놈 독수리야!

용맹스럽게 두 눈 부릅뜨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그들처럼 죽기를 살기처럼 생각한다면

마주하는 산이 언젠가는 문짝처럼 가까워지고

영축산은 또 문짝의 문풍지처럼 얇아지려니

그날이 오면 타는 손가락으로 산을 뻥 찔러보고 싶다.

날아라 독수리야 날아라 독수리야

산에 구멍 하나 내고 입바람을 훅 불어넣고 싶다.

산 뒤에 앉아 계신 이 누구인지 몰라도

냉큼 고수의 북채 뺏어들고

딱! 소리가 나게 산의 정수리 때려

맹금이 날개로 제 몸을 때려서 하늘로 날아가는 소리

마침내 우주로 날아오르는 산을 보고 싶은 것이다. * 

 

* 마당론   

마당에 다 있다, 시를 쓰는 나는 

마당에 나가면 시는 기다리고 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아는 식물학자는 

한 평의 땅에는 

200가지의 식물이 산다고 했다 

살아 있는 생명이 있어

마당 한 평에 200편의 시가 

마당 한 평에 200컷의 사진이 있다 

마흔 넘어 스무 평의 마당을 가진 나는 

4000편의 시창고를 가진 부자 

내게 시로 가는 길을 묻는 이여 

그대 주머니를 털어 마당을 사라 

대백과사전에도 

인터넷 검색창에서 찾을 수 없는 시가

마당에 있다, 미당도 김춘수도 쓰지 못한 시가

마당에 다 있다 

마당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 정일근시집[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시학 

 

* 선암사 뒤간에서 뉘우치다  

무위도식의 오후, 불식을 했다면 산암사 뒷간으로 찾아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녁 예불시간 뱃속 근심이 큰 장독에 고인 물처럼 출렁거려 뒷간에 앉는다. 사실 나는 내 죄를 안다. 그리하여 범종소리 따라 한 겹 한 겹 밀려와 두꺼워지는 어둠에 엉덩이를 깔고 뉘우친다. 가벼워진 세상의 발들 殿을 돌아 장등丈燈이 밝혀주는 애웅전 앞 섬돌을 밟고 오를 시간, 나는 뒷간 무명 속에 발 저리도록 쪼그리고 앉아 진실로 뉘우친다.

내 죄의 반은 늘 식탐에 있다. 법고소리에 기름진 가죽이 함께 울고, 목어의 마른 울음 오장육부를 북북 긁고 간다.  운판 소리의 파편이 뼈 마디마디 파고들어 욱신거린다. 선암사 뒷간에 앉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근심을 버리자! 근심은 버리려 하지 말고 만들지 말아라. 뒷간 아래 깊은 어둠이 죽비를 들어 내 허연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친다. 마음을 비우자! 마음은 처음부터 비워져 있는 것이다.  나무 벽 틈새로 스며들어온 꽃샘바람이 주장자를 들어 내 뺨을 친다.

뱃속 근심이 우주의 근심을 만드는 저녁, 염주알 구르는 작은 원융의 소리에도 사방 십리 안 모든 봄나무들이 깨달음의 문을 열어 꽃등불을 켜는데, 나는 내 몸의 작은 뒷문 하나 열지 못하고, 단 몇 푼의 근심조차 내버리지 못한 채 선암사 뒷간에 쪼그리고앉아 뉘우친다.  

 

* 정일근시인

-1958년 경남 진해 출생

-1985년 [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2001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 2003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기다린다는 것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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