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재삼 시 모음

효림♡ 2009. 5. 5. 10:15

* 아름다운 천 - 박재삼  

나는 그대에게
가슴 뿌듯하게 사랑을 못 쏟고
그저 심약한, 부끄러운
먼 빛으로만 그리워하는
그 짓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가리라고 봅니다
그런 엉터리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남들은 웃겠지만
나는 그런 짝사랑을 보배로이 가졌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짠
아름다운 천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
이 가을
갈대 소리가 되어 서걱입니다
가다가는 기러기 울음을
하늘에 흘리고 맙니다 *

 

* 눈물속의 눈물

내 눈물 마른 요즈음은 / 눈에도 아니 비치는 갈매기야 //
어느 소소(小小)한 잘못으로 쫓겨난 / 하늘이 없던, 어린 날 흘렸던 /

내 눈물의 복판을 / 저승서나 하던 것인가 / 무지개 빛을 긋던 눈부신 갈매기야 / 
꽃잎 속에 새 꽃잎 / 겹쳐 피듯이 //
눈물 속에 새로 또 / 눈물 나던 것이네 *

 

* 모란 송가(頌歌)

얼마 전까지

봄뜰을 수놓았던 꽃들은

겨울을 넘긴 어려움을 따라서

가늘고 여릿하게만

그 아름다움을 겨우 나타내더니

 

지금 천지가

화창한 녹음으로만 덮인 철에는

마치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든든하고 실한 모란이

온 세상의 기운을

한군데로 한군데로만 집중시겨

그모습을 환하게 피어오르나니

 

꽃을 처음으로 꽃같이 보는

이 눈부신 한나절

일력(日歷)은 어쩌면 이때부터 시작되느니라.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램덤하우스중앙

 

* 내 사랑은 

한 빛 黃士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萬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 자는 조약돌을
날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

 

* 빛나는 景觀 
저 푸르고 연한 미루나무의
눈부신 잎사귀에
바람은 어디서 알고
여기까지 찾아와서는
끊임없는 희롱을 하고 있는가
이런 범용한 것을
사람들은 예사로 보고
어떤 정치적 사건에는
그 한때에 머물건만
그것을 들고 큰 야단이네
천년이고 만년이고
한결로 이 빛나는 경관이
한 옆에 있길래
죽고 나면 못 볼 이것을
넋을 잃고 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막상 어디 있는가 *
* 박재삼시집[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민음사

 

* 추억에서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전(生魚物廛)에는

바닷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晋州)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

 

* 석류를 보며
한여름 내내

속으로 속으로만

익어 왔던 석류가

이 가을

하늘이 높고 햇빛이 눈부시고

바람까지 서늘한 때를 택하여

그 가슴을 빠개 놓고

다 익은 속열매를 보여

아름답기만 하구나

 

그러나 임이여

내 가슴은 보일 것이 없어

더 없이 쓸쓸하구나

 

* 홍시(紅枾)를 보며

감나무에 감꽃이 지더니
아프게도 그 자리에 열매가 맺네.
열매는 한창 쑥쑥 자라고
그것이 처음에는 눈이 부신
반짝이는 광택(光澤) 속
선연한 푸른 빛에서
조금씩 변하더니 어느새
붉은 홍시로까지 오게 되었더니라.


가만히 보면
한 자리에 매달린 채
자기 모습만을
불과 일년이지만 하늘 속에
열심히 비추는 것을 보고, 글쎄,
말 못하는 식물이 저런데
똑똑한 체 잘도 떠들면서
도대체 우리는 어디다가
자기 모습을 남기는가 생각해 보니
허무(虛無)라는 심연(深淵)밖에 없더니라.
아, 가을! *

 

* 노래와 꽃과 
귀뚜라미가 열심히
목소리 하나에 온 정령(精靈)을 쏟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노래를 한다고 한들
저 음악을 졸업한 듯이 보이는
소리가 없는 꽃만큼
신의 뜻에 가까운 게 아니어라

꽃의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에 고요히 새겨보라고
이 겨울에는 그 모습 감추고 있건만
캄캄해서 귀가 멀 지경이건만
이 절벽 같은 어둠을 뚫고
무지무지한 참음을 넘어서며
요컨대
노래보다도 먼저
꽃이 그 순수를 앞세워
땅 밑에서 홈을 대어주며
우선 그것을 피우는 것이
하늘 속에 멎기에 제일 어울리는 바이어라 *

 

* 수정가(水晶歌) 

집을 치면, 정화수(精華水)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平床)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山神靈)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水晶)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

 

* 흥부 부부상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面)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面)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本)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

 

* 한(恨)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비채

 

* 아득하면 되리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 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

 

*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 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 

 

* 지는 잎 보면서   

초봄에 눈을 떴다가

한여름 뙤약볕에 숨이 차도록

빛나는 기쁨으로 헐떡이던 것이

어느새 황금빛 눈물이 되어

발을 적시누나

 

나뭇잎은 흙으로 돌아갈 때에야

더욱 경건하고 부끄러워하고

사람들은 적막한 바람속에 서서야

비로소 아름답고 슬픈 것인가

 

천지가 막막하고

미처 부를 사람이 없음이여!

이제 저 나뭇잎을

우리는 손짓하며 바라볼 수가 없다

그저 숙이는 목고갯짓으로

목숨은 한풀 꺾여야 한다

아, 묵은 노래가 살아나야 한다 *

 

* 자연 -춘향이 마음 抄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 바닷가 산책 

어제는

가까운 신수도(神樹島) 근방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어
열댓 살 적으로 돌아와
그리 마음 가려워
사랑하는 이여

안으로 홀로 불러 보았고

오늘은

멀리 창선도(昌善島) 쪽

아까운 것 없을 듯 불붙은 저녁놀에
스물몇 살 때의 열기(熱氣)를 다시 얻어
이리 흔들리는 혼을 앗기며
사랑하는 사람아 
입가에 뇌어 보았다

사랑은 결국 곱씹어
뒷맛이 끊임없이 우러나게 하는
내 고향 바닷가 산책이여! *

* 박재삼시전집-민음사 

 
* 무제 

대구 근교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

* 박재삼시집[천년의 바람]-민음사 

 

* 수양산조(垂楊散調)  

궂은 일들은 다 물알로 흘러지이다
강가에서 빌어 본 사람이면 이 좋은 봄날
휘드린 수양버들을 그냥 보아 버릴까

아직도 손끝에는 때가 남아 부끄러운
봄날이 아픈 내 마음 복판을 뻗어
떨리는 가장자리를 볕살 속에 내 놓아.....

이길 수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오로지 졸음에는 이길 수가 없다
종일을 수양이 뇌어 강은 좋이 빛나네
 * 

* 박재삼시전집-민음사 

 

* 박재삼(朴在森)시인

-1933~1997 일본 동경 출생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정적][섭리] 추천,1956년 현대문학 신인상, 1986년 중앙일보 시조대상,1991년 인촌상 수상
-시집 [춘향(春香)이 마음][간절한 소망][울음이 타는 가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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