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정록 시 모음

효림♡ 2009. 4. 29. 08:10

* 더딘 사랑 -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감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
 

* 이정록시집[의자]-문학과지성사 

 

* 바람아래

제 얼굴로 겨눴던 부채 끝을 어린것들에게 돌리는 데까지 가야
마음도 주름을 접고 편해지는 거여 자네도 땀 범벅인 몸뚱어리 제쳐놓고
새끼들한테 부채질하는 것을 보니께 이제 진짜 어미가 된 것 같구먼
세상에서 첫째로 독한 짐승이 어미라는데 어미 중에서도 제일 독한 홀어미가 되었구먼
신랑 생각은 빨리 털어버리고 여기에다 맘 붙이고 살아가자고
멍하니 평생 바다 끝만 내다 볼 것 같더니 어찌어찌 새끼들 추스리는 것을 보니께
이제 가라고 해도 안 가겠지만 바람아래 떠나는 순간 세상 바람통 속으로 겨 들어가는 것이여
저 뻘속 모래알들이 어찌 그냥 모래들이고 어찌 그냥 조개껍질이겠는가
억만 번도 더 달래고 얼래야 밀물 썰물 몽땅 품을 수 있는 오지랖이 되는 거여
그런 걸 몸이라고 하는 거여                                                   

* 이정록시집[제비꽃 여인숙]-민음사 

 

* 병따개는 입심이 좋다  

동시 한 편 써서

냉장고에 붙여놓는다  

사람 

눈사람은 살 빠지면 죽는다

햇살 다이어트가 가장 위험하다

자꾸만 바닥에 떨어진다고  

 

아내가 자석 병따개로 눌러놓는다 

 

병따개 뒤로 첫 글자만 숨는다 

사람 

사람은 살 빠지면 죽는다

살 다이어트가 가장 위험하다

금강산도 식후경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냉장고가 쉴 새 없이 심호흡한다 

 

가만 보니 병따개는 무쇠 이빨을 갖고 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헛말이다 

 

병따개는 통니 하나가 생명이다  

이 빠지면 죽는다 *

* 이정록시집[정말]-창비 

 

* 나에게 쓰는 편지

모나게 살자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모서리마다

빛나는 작은 칼날

찬물로 세수를 하며

 

서리 매운 새벽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

 

* 다시 나에게 쓰는 편지

콩나물은
허공에 기둥 하나 밀어 올리다가
쇠기 전에 머리통을 버린다

 

참 좋다

 

쓰라린 새벽
꽃도 열매도 없는 기둥들이
제 몸을 우려내어
맑은 국물이 된다는 것

 

좋다 참
좋은 끝장이다

 

* 산 하나를 방석삼아       
단풍나무 아래에 
 
돼지머리가 버려져 있다
돼지는 일생을
 
서 있거나 누워 지낸다
 
앉아 있을 경우는, 오직
새끼를 낳은 암놈이
 
앞발만 세우고 비척거릴 때다
돼지머리는
 

제대로 한번 앉아보려고 
목덜미 아래를 버린 것 같다
선지피는 
 
단풍잎이 다 들이마셨나
도끼가 지나간 자리로 
 
산 하나를 꿰차고 있다
잘린 목으로 
 
일찍 떨어진 낙엽을
 
어루만지고 있다
 

* 이정록시집[대해 속의 고깔모자]-고요아침 

 

* 줄탁(啐啄)  

어미의 부리가
닿는 곳마다

별이 뜬다

한 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밤하늘엔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빗나간 부리질이 있다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친다 *

 

* 청국장  

영덕식당 아주머니가 
청국장 백반을 이고 온다
신문지 한가운데 둥근 투가리에서
김이 폴폴 오르고, 그걸 맛보겠다고
하느님이 눈발이 되어 뛰어내린다
하느님도 무게가 제법인지
아주머니가 허리를 펴고 멈춰 선다
여관 신축공사장 삼층으로 오르면
눈발 하느님은 국물도 없을 것이다
시멘트 범벅인 장화 하느님들이
단체손님을 받을 제일 큰방에서
신문지를 확 걷어치울 것이기 때문이다
삽 자루나 질통에 이마를 부딪힌 채
선배님들의 입 속으로 후룩후룩 넘어가는
청국장을 아름다이 바라볼 것이다
그들 가운데 젊은 운동화가
컵라면 빈 그릇에 남은 반찬을 쓸어 담아
소주 됫병 옆에 밀어놓는다
저걸 한 모금 들이켰으면 좋겠다고
눈발 하느님이 몸서리를 치자

크윽, 눈길도 없이 녹아버린다 

 

* 기러기떼
지상(地上)과의 인연
더 차가워져야 한다
활시위처럼 몸 당겨
겨울로 간다
작살 같은 대오로
하늘을 끌고 간다
몸 비트는 하늘

깃털처럼, 백설(白雪) 쏟아진다

 

* 대추나무  

땅바닥으로 머리를 디미는 시래기의 무게와

옆구리 찢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대추나무의 버팅김이

떨며 떨리며, 겨우내 수평의 가지를 만든다


봄이 되면 한없이 가벼워진 시래기가

 

스런스런 그네를 타고, 그해 가을

버팀목도 없이 대추나무는

닷 말 석 되의 대추알을 흐드러지게 매다는 것이다

 

* 대추나무

가시만으로 가볍게 겨울을 건널
다섯살바기 대추나무 두 그루에
무밭 한 뙈기가 걸쳐 있다

저, 솜털가시 싯푸른 무 줄거리들
눈비 맞으며 말라가리라

땅바닥으로 머리를 디미는 시래기의 무게와
옆구리 찢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대추나무의 버팅김이
떨며 떨리며, 겨우내 수평의 가지를 만든다

봄이 되면 한없이 가벼워진 시래기가
스런스런 그네를 타고, 그해 가을
버팀목도 없이 대추나무는
닷말 석되의 대추알을 흐드러지게 매다는 것이다

* 이정록시집[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문학과 지성사

 
* 겨울편지  
처마 밑 고드름을 치고 가는 식전바람같이
뒷덜미 서늘한가 마른 시래기를 들추는 허기진 바람처럼
숨결 뜨거운가 된장찌개 졸아붙는 숯불 아궁이
방고래를 지나 굴뚝까지 다다를 수 있겠는가
무 껍질 벗기듯 제 살 도려내는 겨울바람
고드름 뚝뚝 부러지는 봄 햇살까지 갈 수 있겠는가

 

* 마디  

마디와 마디 사이에
두 가닥씩 칼금이 그어져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나무는
그 등고선의 기울기와 간격으로
하늘 높이 몸을 디민다

 

새가 대나무 꼭지에 앉는다
수많은 마디들이 새의 무게를 갖고 논다
또한 새떼의 수많은 뼈마디가
대나무를 흔들며 합창을 한다

 

바람의 마디와 하늘의 마디도
대밭, 둥근 방으로 몸을 퉁기며 노닌다

 

시끌벅적 앞다투는
댓이파리들의 노래 위에 눈이 쌓이면
대나무는 간혹 몸을 꺾는다
백설의 마디며 물의 마디를 모르는
이파리들의 고성방가들

 

대숲 속에는 마디를 모르는 것들이
바닥을 덮는다, 켜켜이
썩어가는 이파리에게 마디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하얀 대뿌리, 그 잘디잔 말씀이 뻗어나간다

 

* 비 그친 뒤

소나기가 안마당을 두드리고 지나가자 놀란 지렁이 몇 마리가 대문 쪽으로 서둘러 기어간다

방금 알을 낳은 암탉이 성큼성큼 뛰어와 지렁이를 삼키고선 연필 다듬듯 부리를 문지른다

 

천둥번개에 비틀거리던 하늘이 그 부리 끝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는다 개구리 한 마리를 안마당에 패대기친

수탉이 활개치며 울어 제치자 울밑 봉숭아며 물앵두 이파리들이 빗방울을 내려놓는다 병아리들이 엄마 아빠를

섞어 부르며 키질 위 메주콩처럼 몰려다닌다

 

모내기 중인 무논의 물살이 파르라니 떨린다 온 몸에 초록 침을 맞는 무논의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다 침 맞는 자리로

구름 몇이 다가온다 개구리의 똥꼬가 알 낳느라고 참 간지러웠겠다 암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논 쪽을 내다본다

 
* 구부러진다는 것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치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것이다
햇살 때문만이 아니다, 구부러지는 힘으로
고추는 죽어서도 맵다

물고기가 휘어지는 것
물살을 치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말하겠다
내 마음의 꼭지가, 너를 향해
잘못 박힌 못처럼
굽어버렸다

자, 가자!

굽은 못도
고추 꼭지도
비늘 좋은 물고기의 등뼈를 닮았다
 

* 도깨비기둥

당신을 만나기 전엔
강물과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나 두내받이, 그 물굽이쯤이 사랑인줄 알았어요

피가 쏠린다는 말, 배냇니에 씹히는 세상 어미들의 젖꼭지쯤으로만 알았어요
바람이 든다는 말, 장다리꽃대로 빠져나간 무의 숭숭한 가슴정도로만 알았어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한밤
강줄기 하나가 쩡쩡 언 발을 떼어내며 달려오다가, 또 다른 강물의 얼음 진군(進軍)과 맞닥뜨릴 때!
그 자리, 그 상아빛, 그 솟구침, 그 얼음울음, 그 빠개짐을 알게 되었지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얼어붙는다는 말이 뒷골목이나 군인들의 말인 줄만 알았지요. 불기둥만이 사랑인줄 알았지요

마지막 숨통을 맞대고 강물 깊이 쇄빙선(碎氷船)을 처박은 자리, 흰 뼈울음이 얼음기둥으로 솟구쳤지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그게 바로 도깨비기둥이란 걸 알았지요. 열길 물속보다 깊은

한 길 마음만이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강물은 흐르는 게 아니라 쏠리는 것임을

 

알았지요. 다 얼어버렸다는 것은 함께 가겠다는 것
금강(金剛) 기둥으로 지은 울음 한 채, 먼 하늘주소까지 *

 

* 햇살의 經文 
날고 싶은 것들이 죽어 흙이 되면 기왓장으로 태어난다
절 마당 가득한 저 기왓장들은 곧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새를 꿈꾸던 영혼의 깃털마다 가족 이름과 골목길 복잡한 주소들이 적혀 있다
커다란 새 한 마리가 갈비뼈 뒤편에 업장을 서려 물고 있는 것이다
날고 싶던 것들의 극락왕생에 낙서하지 마라
목어처럼 텅 빈 새의 뱃속에 알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법당 문이나 환하게 열어젖혀라
그리하여 그 새 똥구멍으로 들이치는 찬란한 햇살에 눈이나 부비거라 *

 

* 뒷짐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뒤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 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자신의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
등뒤에 양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
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
낮은 언덕의 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
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
허공 한 채를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밀쳐놓은 빈손 위에

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 이정록시집[의자]-문학과지성사

 

*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백 대쯤

엉덩이를 얻어맞은 암소가

수렁논을 갈다 말고 우뚝 서서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불현듯 고개를 꺾어

제 젖은 목주름을 보여주고는

저를 후려 팬 노인의

골 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긴 속눈썹 속에

젖은 해가 두 덩이

오래도록 식식거리는

저물녘의 수렁논 * 

* 이정록시집[의자]-문학과지성사

 

* 첫눈
청무 뽑아낸 자리
빗살무늬 토기 속으로
첫눈 내린다

토기 안에 남은
무의 실뿌리, 그 얼어붙은 발가락이 안쓰러워
무밭에 눈은 쌓인다 

 

양손을 모두면

내 오목한 토기, 끊긴 실금 위로도

눈발이 안긴다

 

이파리 푸른 무가 되어

그대 실뿌리까지 빨아올리던

첫날밤처럼

 

내 손우물의 첫눈은

촉촉이 젖어든다, 훌쩍이던 밤

그대 작은 샘처럼

붉디붉은 빗살무늬 토기처럼

* 이정록시집[의자]-문학과지성사 

 

* 이정록시인

-1964년 충남 홍성 출생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혈거시대]당선, 2001년 김수영문학상, 2002년 김달진문학상 수상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제비꽃 여인숙][의자].....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생진 - 그리운 바다 성산포 41~81  (0) 2009.05.05
황지우 시 모음  (0) 2009.04.30
윤석산(尹錫山) 시 모음   (0) 2009.04.29
신용목 시 모음  (0) 2009.04.28
서정주 시 모음  (0) 2009.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