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윤석산(尹錫山) 시 모음

효림♡ 2009. 4. 29. 08:09

* 묘약(妙藥) - 윤석산  

꽃나무 환한 그늘 아래 잠이 들었네
온통 꿈 속 꽃잎 휘날리고

누군가 가만히 와서 흔드는 손길
나는 오래도록 깨어나고 싶지 않았네

 

* 그 사내  

도저히 입 떼지 않아
군내는 고사하고 입 안 그득 곰팡이 슬었을 듯한
그 사내와
마주하고 선다

천 길 불길 속에서 녹고 녹아
심장까지 다 녹아 아, 아 다시 비로자나불로
태어난 사내
(나 이곳에 앉아 있으려니
그대들 이 자리에 피안에 이를 절집 한 채
지을지니)

이제 입 열어 세상 향해
“이놈들!”하고
대갈일성 함직도 한데
여전히 입 꾹 다물고만 있는

오늘도 다만 천 길 불길 속 견디고만 있는 그 사내

붉디붉은 해
뉘엿뉘엿
오늘도 천년의 그 어깨 너머로 넘기고만 있다 *

 

신문을 집으며  
신문은 늘 아버지의 차지였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사이 누군가
대문의 틈새에 비집고 놓고 간
세상의 일들
 
실상 아버지 말고는 누구의 관심거리도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저 많은 세상의 일들 속에
서 계시는구나
우리는 다만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오늘도 현관을 열고 어스름 새벽녘
누군가 던져 놓은 신문을 집는다
무심코, 그저 이 일이 내 몫인 양 
온갖 세상의 일들, 그러나 덤덤한 표정으로
내 앞에 펼쳐진다
 
아버지도 이랬을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세상의 일들에 묻혀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뒤적이며

아, 아 이래셨을 것이다 
아버지
오늘도 그렇게 세상을 걸어 나가신다 *
* 윤석산 시집[밥 나이 잠 나이]-황금알

 

* 들창코 부처님  

대웅전도 병부전도 없는 성주사지 터

온 몸 망가진 석불 하나 덩그마니 서 있다

반즘 떨어져 나간 부처님 귓불

붉게 물들이며

저녁 해 뉘엿뉘엿

또 다른 세상 밖으로 기울고 있다

 

참으로 아픈 곳도 많고 많으신 부처님

 

사지 육신 어디 성한 곳 하나 없는데

아들 낳으려는 중생들의 욕심이

긁어먹어 버린,그래서 문드러진

부처님의 들창코

세상의 온갖 더러운 향내, 벌름거리고 계시다

 

* 밥 나이 잠 나이  

지금까지 나는 내 몸뚱이나 달래며 살아왔다
배가 고파 보채면 밥 집어넣고
졸립다고 꾸벅이면 잠이나 퍼 담으며
오 척 오 푼의 단구, 그 놈이 시키는 대로
안 들으면 이내 어떻게 될까보아
차곡차곡 밥 나이 잠 나이만, 그렇게 쌓아왔다 *

 

* 산수유 

지리산 자락 산수유

뜨거운 폭염의 여름을 지나며

햇살 속 익고 익고 또 익어 가을이 되면

빨간 눈알 같은 열매를 맺는다

 

가을 햇살 한 뼘이라도 놓칠세라 멍석에 펼쳐 말리고 말려

산수유가 발긋발긋 말 그대로 가을 햇살이 되면

아낙들은 둘러 앉아 산수유를 깐다

 

빨간 열매 안에 웅크린 독이 든 씨앗

일일이 "입"으로 까서 발려내고, 빨간 살집만 다시 넣어놓는다

으로 깐 산수유

다른 한쪽으로는 빨간 산수유 열매를 받아내는

입으로 하는 작업

 

마을 아낙들의 구수한 입담 같은 가을 햇살멍석

지리산자락 그들먹이 번져갈 때

빨간 산수유, 침이 가득 고인 입, 그 안에서

쌉쌀한 약이 된다

그래서 허리 부실한 사내들의 오줌줄기

지리산 밑둥만큼

시원스레 키우는, 가을 보약이 된다 * 

 

* 빙빙  

집에서 잘못을 하고는 밖으로 도망 나와 동네 어귀를

빙빙거리며 돌아다닌다. 집에 들어가면 야단맞을 것이
뻔하니. 저녁이 되고 집집마다 굴뚝에서 저녁 짓는 연
기가 올라와도, 어둑어둑 산 그림자를 타고 어둠이 내
려와도, 나를 찾는 소리는 없다. '석산아 얼른 들어와
밥 먹어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들어갈 텐데.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일찌감치 저녁을 먹은 아
이들이 나와 놀면서, 너 야단맞을까봐 못 들어가지. 그
래도 어머니는 아직도 부르지 않으신다. 이제 내 나이
예순 하고도 두서너 살. '석산아 얼른 들어와 밥 먹어라.'
아직도 나는 빙빙, 어머니 부르는 소리가 기다려진다 *

 

* 첫눈  

예진이가 사는 집은 시장통 한 평도 채 되지 못하는 단칸방

할머니랑 함께 꼭 끌어낮고 누우면 얼추 꽉 찬다

다 늦게 시장통 한켠에 있는 공중변소엘 가려고

예진이가 이불을 꽁꽁 싸매고 쪽문을 열었다

반쯤 열린 쪽문 사이로, 깜깜한 밤하늘 함박같이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할머니, 이제 화장실 가기가 힘들겠어요...."

첫눈은 그렇게 한밤 내내

발목 폭폭 빠지는 여섯 살 예진이의 꿈속에 쌓이고 있었다

 

* 편지

오뉴월 꽃그늘이 드리우는 마당으로 우체부는 산골 조카의 편지를 놓고 갔구나, 바람 한 점 흘리지 않고 꽃씨를 떨구듯
편지는 활짝 종이 등을 밝히며 서로를 파란 가슴을 맞대고 정겨운 사연을 속삭이고 있구나
찬연한 속삭임은 온 마당 가득한데, 꽃씨를 티우듯 흰 깁을 뜯으면 샘재봉 골짜기에 산딸기 익어가듯

조카는 예쁜 이야길 익혀놨을까
모두 흰 봉투에 숨결을 모두우며 꽃내음 흐르는 오뉴월 마당으로
[석 산 이 아 저 씨 께]
아, 조카가 막 기어다니는 글씨 속에서 예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구나

 

* 폭설

먼 산 가까운 산 한데 엉기어

눈 속에 몸을 숨긴다. 눈 속에 몸을 숨긴다. 우리의 둔감해진 원근법. 포개진 앵글을 조정하며, 우리의 전신, 아 셧더를 누른다

그러나 언제나 꿈은 인화지 밖으로 달아난다 *

 

* 한계령에서의 일박(一泊)
잠 속으로 스며들며, 때로는 보르헤스의 생각을 뒤적이며
우리는 그곳에 가 닿았다
계곡의 물은 엄청 불어 있었다
차창 밖으론 아직 드문드문 빗방울이 들고
오랜 시간 동안 몸을 기댔던 의자를 밀치며
우리는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때 뿐
우리는 다시 관성의 의자로 몸을 꾸겨넣었다
한계령의 무성한 나뭇잎과 바위, 그리고 산등성만이
덤덤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곡의 물이 늘었다는 것은 실은 아무러한 의미가 되지를 못했다
사람들이 모이고, 어느 날을 잡아 길을 떠나고
잠시 떠난 도시를 잊고
늘 우리의 식탁에서 만나는 중국산 산채나물이지만
그러나 새로워 하며
실은 새로움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며
밤이 이슥토록 우리는 이야기의
이야기의 기나 긴 꼬리를 이어나갔다
주위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지고 어둠이 더욱 더 짙어 질 때
아, 아 비로소 하늘의 별들이 빛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눈가로 매달려오는 졸음을 떨어내며
이러면 안 되는 데, 안 되는 데
가물가물 어둠에 묻혀 가는 설악산, 그 우람함이
이내 계곡 물소리에 온몸을 헐어내어
서로의 잠 속으로 덧없이 스며들고
우리는 물소리에 떠밀리어, 떠밀리어
머나 먼 강, 그 푸르름의 심연을 크나 큰 새가 되어
어느덧 훨훨 건너가고 있었다 * 

 

* 입적(入寂)  

"이만 내려놓겠네."

 

해인사 경내 어느 숲 속
큰 소나무 하나,
이승으로 뻗은 가지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

 

지상으로 지천인 단풍

문득
누더기 한 벌뿐인 세상을 벗어 놓는다
 *

* 윤석산시집[적]-시와시학사  

 

* 윤석산(尹錫山)시인

-1947년 서울 출생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및 197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2009년 편운문학상을 수상

-시집 [처용의 노래][적][밥 나이, 잠 나이].....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지우 시 모음  (0) 2009.04.30
이정록 시 모음  (0) 2009.04.29
신용목 시 모음  (0) 2009.04.28
서정주 시 모음  (0) 2009.04.23
김소월 시 모음  (0) 2009.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