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황지우 시 모음

효림♡ 2009. 4. 30. 08:16

* 화엄광주(華嚴光州) - 황지우   

그때에 온 사찰과 교회와 성당과 무당에서

다 함께 종 울리고

집집마다 들고 나온 연등에서도 빛의

긴 범종 소리 따라 울리리라 ...

땅에서는 환호성, 하늘에서는

비밀한 불꽃 빛 천둥 음악

마침내 망월로 가는 골목 山水에는

기쁜 눈으로 세상 보는 보리수 꽃들

푸르른 억만 송이, 작은 귓속말 속삭이고 ...

화엄광주 일부 

 

* 삶

비 온 뒤

또랑가 고운 泥土 우에

지렁이 한 마리 지나간 자취,

5호 唐筆 같다. 

一生一代의 一劃,

劃이 끝난 자리에

지렁이는 없다

 

나무관세음보살 *

 

* 무등

절망의 산,

대가리를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 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회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폭발적

인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槍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希望의 한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 황지우시집[게 눈 속의 연꽃]-문지

 

*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무궁(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

* 황지우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 구름바다 위 雲舟寺

비구름 끼인 날

運舟寺, 한 채 돛배가

뿌연 연초록 和順으로 들어오네  

가랑이를 쩌억 벌리고 있는 浦口  

천불천탑이 천만 개의 돌燈을 들고 나와 맞는다  

해도, 그게 다 마음 덩어리 아니겠어?  

마음은 돌 속에다가도 情을 들게 하듯이  

구름돛 활짝 펴고 온 우주를 다 돌아다녀도  

정들 곳 다만 사람 마음이어서  

닻이 내려오는 이 진창  

비구름 잔득 끼인 날  

산들은 아주 먼 섬들이었네 *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

* 황지우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 거대한 거울  

한점 죄(罪)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나는 거울

 

* 거룩한 저녁 나무 - 김용택 시백(詩伯)에게 
급식소로 밥 타러 가는 사람처럼 

저녁을 받는 나무가 저만치 있습니다 

혼자 저무는 섬진강 쪽으로 천천히
그림자를 늘이는 나무 앞에 兄이 서 있을 때
옛 안기부 건물 앞 어느 왕릉의 나무에게
전, 슬리퍼를 끌며 갑니다 

그 저녁 나무, 눈 지긋하게 감고

뭔갈 꾹 참고 있는 자의 표정을 하고 있데요

형, 그거 알아요
아, 저게 '거룩하다'는 형용사구나
누군가 떠준 밥을 식반에 들고 있는 사람처럼

제 손바닥에 놓여진 생을 부끄러워할 때
혹은 손바닥을 내밀고 매 맞는 아이처럼

생의 빈 바닥을 아파할 때

저녁 나무는 이 세상 어디선가 갑자기 

울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서 있나봐요  
형이나 저나, 이제 우리, 시간을 느끼는 나이에 든 거죠
이젠 제발 '나' 아닌 것들을 위해 살 때다, 자꾸

되뇌기만 하고, 이렇듯 하루가 나를 우회해서

저만큼 지나가버리는군요
어두워지는 하늘에 헌혈하는 자처럼 굵은 팔뚝 내민
저녁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저는, 지금 이 시간 
세상 밖 강물 소리 듣는 형의 멍멍한 귀,

잠시 빌려가겠습니다; 그 강에

제 슬리퍼 한 짝, 멀리 던지고 싶소 *

* 황지우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 여기서 더 머물고 싶다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ㅡㅡ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장사(內藏寺)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 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

* 황지우시집[바깥에 대한 반가사유]-휴먼앤북스

 

*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

* 황지우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심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 

* 황지우시집[바깥에 대한 반가사유]-휴먼앤북스

 

* 물고기그림자  

맑은 물 아래
물고기는 간데없고
물고기 그림자들만 모래 바닥에 가라앉아 있네
잡아 묵세, 잡아 묵세
마음이 잠깐 움직이는 사이에
물고기 그림자도 간데없네
눈 들어 대밭 속을 보니
초록 햇살을 걸러 받는 저 깊은 곳,  
뭐랄까, 말하자면 어떤
神性 같은 것이 거주한다 할까
바람은 댓잎새 몇 떨어뜨려
맑은 모래 바닥 위
물고기 그림자들 다시 겹쳐놓고,  
고기야, 너도 나타나거라
안 잡아묵을 텡께, 고기야
너 쪼까 보자
맑은 물가 풀잎들이 心亂하게 흔들리고
풀잎들 위 풀잎들 그림자, 흔들리네 *

* 황지우시집[바깥에 대한 반가사유]-휴먼앤북스

 

*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 황지우시집[바깥에 대한 반가사유]-휴먼앤북스

 

* 황지우시인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입선,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문학과지성 등단,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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