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생진 - 그리운 바다 성산포 41~81

효림♡ 2009. 5. 5. 10:13

41. 죽을 기회 - 이생진
도희는
늘 죽음을 방해하지만
바다는 기회를 주어도 좋다

성산포에서는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어 좋다


42. 갈증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칼이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양(量)이다

그릇 밖에서 출렁이는
서글픈 아우성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갈증이다

43. 동백꽃
섬에는 어딜가나 동백이 있다
동백이 없는 섬은
동백을 심어야지

동백은 섬을 지키기에
땀을 흘렸다

동백은 바위에 뿌리박기에
못이 박혔다

동백은 고독이 몰려와도
울지 않았다

44. 하늘에게

하늘이여
바다 앞에서
너를 처다보지 않는 것을
용서하라

하늘이여
바다는 살았다고 하고
너는 죽었다고 하는 것을
용서하라

너의 패배한 얼굴을
바다 속에서 더 아름답게
건져 내는 것을
용서하라

그 오만한 바다가
널 뜯어먹지 않고
그대로 살려준 것을 보면
너도 바다의 승리를
기뻐하리라

하늘이여
내가 너를
바다 속에서 보는 것을
용서하라

45. 고독

나는 때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46. 섬 운동장

국민학교 운동장이
바다 쪽으로 기울었다
선생도 학생도
바다 쪽으로 기울었다

47. 섬 묘지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 두었다

48. 섬에서 사는 토끼

외로운 섬 토끼
다른 섬에 옮겨 살려고
거북이 등에
올라탔다는 이야기
지금 그 심정 알겠다
허허 망망
바다 한가운데
내가 떠 있어 보니
그때 심정 알겠다

49. 무인도

무인도라고 찌뿌리는 것은
섬이 아니라 물살이다

외로워 살 맛이 없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은
등대가 아니라
소나무 소리다

백년을 살아도
살맛이 없다고
신경질 부리는 것은
바위가 아니라
풍란이다

50. 해상에서

이쯤오니
세상사 모두 금(線) 하나로
끝난다
부산과 여수가 그렇고
종로에서 미아리가 그렇고
그립다고 모여든
커피와 의자
암으로 죽은 그 사람이나
생으로 죽은
그 사람이나
이쯤오니
모두 금 하나로
끝난다
그러다간
모진 섬 하나 지나면
나 여기 있다고
소리쳐진다 

 

51. 점령

저 말없는 섬을
누가 먼저 점령했느냐
-교회-
다음은 누구냐
-술집-
그 다음은 누구냐
-은행-
저 섬을 무엇으로 쓸거냐
-풍경화-
예 이놈
돈으로 써야지 이런 인상 저런 이유
홍도에서 흑산도
다시 흑산도에서 기좌도로
섬을 보며 이기(利己)를 보며
생활을 보며 회의를 보며
나처럼 사는 것은 외롭고
너처럼 사는 것은 지루하고
결론도 해결도 없이
기좌도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다시
추자도로 온다

52. 무명도(無名島)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53. 낮잠
술에 취한 섬
물을 배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54. 부자지간

아버지 범선 팔아
발동선 사이요

얘 그것 싫다
부산해 싫다

아버지 배 팔아
자동차 사이요

얘 그것 싫다
육지놈 보기 싫어
그것 싫다

아버지 배 팔아
어머니 사이요

그래
뭍에 가거든
어미 하나 사자

55. 우도(牛島)
끊어졌던 물이
서로 손을 잡고 내려간다
헤어졌던 구름이 다시 모여
하늘에 오르고
쏟아졌던 햇빛이 다시 돌아가
태양이 되는데
우도(牛島)는 그렇게
순간처럼 누웠으면서도
우도야
우도야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56. 외로움

날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 살기 싫어
퍽퍽 넘어지며 운다

큰산이 밤이 싫어
산짐승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리를 차 내버린다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가듯
바다도 물 속으로
물 속으로
밤을 피해간다

57. 내가 서 있는 곳

낮에 서 있는 나는
원주(圓周)를 울타리 삼은
중심에 서 있고
밤에 서 있는 나는
원통(圓筒)에 들어 있는
감금으로 서 있다

58. 풀밭에 누운 우도

물에 넘어진 사람들의 유족은
물이 원수이겠지만
내 앞의 창해는
소 한 마리 누워있는 풀밭
꼬리치는 대로
흰 나비 하나
날아갔다 날아온다

59. 아부

몇 줄의 시를 쓰기 위해
창경원 꽃사슴에 아부하고
며칠을 더 살기 위해
세월에 아부했다 치더라도
바다 앞에서는
내가 아부할 수 없다

60. 한 모금의 바다
어망에 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수문에 갇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갈매기가 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하루살이 하루 산 몫의 바다도
빠져나와
한 자리에 모인 살결이 희다
이제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 자리
그대로 천년만년
길어서 싫다

 

61. 물귀신

귀신도 물귀신은
바다에서 세방살이를 하는 놈
나를 보면
질투가 심해져
다리를 감는데
나는 항상 아버지 말씀대로
왼다리를 감아서 왼쪽으로 내던졌다
제놈은 한 번도 바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바다에 살고
나는 바다에 살지 않으면서
바다를 좋아하는 것을 안 모양
차라리 산돼지라면
우직해서 동정이 가겠는데
제 놈은 무식해서
바다가 싫은 모양이다

62. 추억
한 여름 땀을 씻으며
일출봉에 올라가
풀위에 누웠는데
햇빛이 벌떼처럼 쏟아지더군
여기서 누굴 만날까
장미같은 여인인가
가시 찔린 시인인가
그런 것 다 코웃음 치다가
내려오는데
신혼여행으로 온 한 쌍의 부부
셔터를 눌러달라고 하더군
그 사람들 지금쯤
일남일녀 두었을 거다
그 사진은 사진첩에 묻어두고
이혼할 때쯤 되었을 거다
이혼하거든 여기서
바다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돌이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추억이랑 살지

63. 넋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워할 것도 없이
돌아선다

사슴이여 살아 있는 사슴이여
지금 사슴으로 살아 있는 사슴이여
저기 저 파도는 사슴 같은데
산을 떠나 매 맞는 것
저기 저 파도는 꽃 같은데
꽃밭을 떠나 시드는 것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움도 없이 말 하나 않지만

64. 사람이 꽃 되고
꽃이 사람이 된다면
바다는 서슴지 않고
물을 버리겠지
물고기가 숲에 살고
산토끼도 물에 살고 싶다면

가죽을 훌훌 벗고
물에 뛰어들겠지
그런데 태어난대로
태어난 자리에서
산신(山神)에 빌다가 세월에 가고
수신(水神)에 빌다가 세월에 간다

65. 낮에서 밤으로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 생각없이 해를 본다
해도 그렇게 나를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나니
밤이 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워서
밤이 되어버린다

66. 보고 싶은 것
모두 막혀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있는 것처럼
보일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거다

67. 풀 되리라
풀 되리라
어머니 구천에 빌어
나 용되어도
나 다시 구천에 빌어
풀 되리라

흙 가까이 살다
죽음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물 가까이 살다
물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편한 사람 되어도
나 다시 공부해서
풀 되리라

68. 전설-비문(碑文)

남편의 친구가 남편을 살해하고
남편의 친구가 남편이 된 남편과
한 평생 살다가도
남편의 친구인 남편이
남편을 죽여다는 고백을 듣고는
남편의 친구인 남편에게서
낳은 아홉 형제를 살해하고
저도 그 남편따라 죽었노라
쓰여있다

69. 전설-이가(李歌)
날마다 숫처녀 하나씩 내놓으라는
뱀의 혓바닥에 창을 박은
이삼만은 총각으로 쓰러졌지만
살아남은 처녀들은 살아서
시집간다
바닷가 돌담을 돌아
바닷물에 치맛자락 적시우며
시집간다
전설도 타지않고
세월과도 관계없이
숫처녀는 살아서
시집간다

70. 전설-홍가(洪歌)

하루 아침에 장수가 될 수 있는 비결은
태몽이고
그 태몽이 들어맞으면
한자리 하는 것인데
그것이 하늘에 별따기
어쩌다 별을 따와도
그걸 숨길 수 없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홍업선(洪業善)짚신에
별이 묻어와서 장수 될 뻔 했는데
그 애비 겁이나서
날갯죽지 찢은 것이
별은 떨어지고
안마당엔 흰 눈이
가난만큼 쌓였단다

 

71. 전설-옛날의 기근
옛날 옛적에
거짓말이라고 웃어버릴 만큼
흉년이 들었을 때
흙을 땀에 개어 성을 쌓고 있었을 때
바다만은 속시원히 웃고 있었을 때
김통정 장군은 큰 칼을 차고 있었을 때
돌보다도 못한
고씨 부씨 양씨
돌보다도 못 먹은 손으로
큰 돌위에 또 큰 돌을 쌓고 있었을 때
바다만은 속시원히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여치가 살찐 목소리로 우는구나

72. 전설-곧은 낚시  

끼니가 간 곳 없는 홍씨
파도소리같은 것
귀에 없고
절벽같은 원망
눈에 없고
오늘밤 젯상에
물고기 하나
곧은 낚시에 물리기만 하면
감지덕지 세상은 태평성대

지성이면 감천이라
곧은 낚시로 건져낸 물고기
그날 밤 젯상에 쓰이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73. 전설-구십구암설
구십구개의 기암
형틀에 매달려서
죄와 벌을 번갈아 치루며
바닷물이 바닥나길
기다린다

74. 전설-막산이란 놈
막산이란 놈
한 자리에서
백인분을 먹더니
나도 요즈음 불고기
오인분은 먹겠다만
막산이란 놈
남의 집 머슴살며
한 끼 백인분을 먹다니
식량을 댈 수 없어
쫓겨난 막산이 놈
남의 집 돌담 밑에서
처량한 귀뚜라미 된다
저 물만 마시고 살 순 없을까
성산포 앞바다
그 아랫 물까지
실컷 마셔 봤으면

막산이란 놈
토굴에서 배 곯아 죽었단다

75. 전설-일출봉
일어서고 쓰러지는 것을
승부라하면
바위는 이긴 거고
바다는 진 것인가
백마리의 맹수가
아흔 아홉의 기암으로
덤벼들 때

그 때마다 바위는
꼿꼿한 승리
백마리의 맹수는
파죽지세
바다는 그 때마다
뼈아픈 침묵
아흔 아홉개의 기암은
꿀 먹은 벙어리

76. 전설-조실부모하고
둘이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눈물로 자란 사이
둘이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바다물로 살아온 사이
부부가 된 다음날
사내는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이

바다는 그들의 조실부모 모르고
기막힌 남편인데
바람은
그것을 모르고
울며 불며
세월이 가도
바람은 그것을 모르고

77. 전설-장수론(將帥論)
전설을 빌면
저 바위도 이 바위도
모두 장수의 짓이라고
저 바다를 이 바다로
옮겨 놓은 것도
장수의 짓이라고
그런데
그 장수
세월을 옮겨놓지 못하고
왜 죽었을까

78. 삼백육십오일
삼백육십오일
두고 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 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79. 그리운 바다
내가 돈보다 좋아하는 것은
바다
꽃도 바다고 열매도 바다다
나비도 바다고 꿀벌도 바다다
가까운 고향도 바다고
먼 원수도 바다다
내가 그리워 못 견디는 그리움이
모두 바다가 되었다

끝판에는 나도 바다 되려고
마지막까지 바다에 남아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다가 삼킨 바다
나도 세월이 다 가면
바다가 삼킨 바다로
태어날거다

80. 고독한 무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81. 바다에서 돌아오면
바다에서 돌아오면
가질 것이 무엇인가
바다에선 내가 부자였는데
바다에서 돌아오면
가질것이 무엇인가
바다에선 내가 가질 것이
없었는데
날아가는 갈매기도
가진 것이 없었고
나도 바다에서
가진 것이 없었는데
바다에서 돌아가면
가질것이 무엇인가 
 

 

* 이생진시집[그리운 바다 성산포]-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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