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곽재구 시 모음

효림♡ 2009. 5. 8. 08:00

*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 산수유꽃 필 무렵  

꽃이 피어서

산에 갔지요

 

구름 밖에 

길은 삼십리

 

그리워서 

눈 감으면 

 

산수유꽃

섧게 피는 

꽃길 칠십리 *

 

* 나뭇잎배

강으로 가는

길목에서 

매일 나뭇잎배 

하나씩을 띄웠습니다 

 

그 

나뭇잎배에 

나는 내 이름이나 

영혼의 흔적같은 것을 

새기지 않습니다 

 

어쩌다 

당신이 내 배를 발견하곤 

말하겠지요 

난 너를 알아 

네가 만든 이 작은 배도 *

 

* 새벽 편지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의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

 

* 희망을 위하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여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일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질러오는

한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

 

* 기다림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 두 사람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꽃길을 지나갑니다
바퀴살에 걸린

꽃향기들이 길 위에
떨어져 반짝입니다

나 그들을

가만히 불러 세웠습니다
내가 아는 하늘의 길 하나
그들에게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불러놓고 그들의 눈빛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그들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불러서 세워놓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

 

김치찌개 평화론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 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애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헐,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
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
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

 

* 마음

아침저녁
방을 닦습니다
강바람이 쌓인 구석구석이며
흙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그러나 매일 가장 열심히 닦는 곳은
꼭 한 군데입니다
작은 창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움켜쥔 걸레 위에
내 가장 순결한 언어의 숨결들을 쏟아붓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나 꽉 차 있는 빛나는 자리입니다. *

 

* 바람이 좋은 저녁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 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라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깔깔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 단오(端午)

사랑하는 이여
강가로 나와요
작은 나룻배가 사공도 없이
저 혼자 아침 햇살을 맞는 곳
지난밤
가장 아름다운 별들이
눈동자를 빛내던 신비한 여울목을
찾아 헤매었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곳으로 와요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
햇창포 꽃잎을 풀고
매화향 깊게 스민 촘촘한 참빛으로
당신의 머리칼을 소복소복 빗겨드리겠어요
그런 다음
노란 원추리꽃 한 송이를
당신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
꽂아드리지요
사랑하는 이여
강가로 나와요
작은 나룻배가 은빛 물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곳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칼을 빗겨드리겠어요 *
* 곽재구시집[참 맑은 물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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