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대 등본 -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 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謨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 산수유꽃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를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기 전 가끔은 돌이켜 아픈 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저 뜨거움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임을 안다
마당귀에 산수유꽃이 피는 철도 독감이 잦아 옆구리에 화덕을 끼고 자다 나는 停年이 되어버렸다
노비의 뜰에나 심었을 산수유나무
면도날을 씹는 봄 햇살에 걸려 잔물집 노랗게 잡힐 적은 일없이 마루턱에 앉아 동통을 앓고
文書처럼 서러운 기억이 많다
한 뜨거움의 때를 유배시키기 위해 몸이 키우는 물집 그 수맥을 짚고 산수유가 익는다고 비천하여 나는 어깨의 경사로 비탈을 만들고 물 흐르는 소리를 기다리다 늙은 것이다
시간의 문장은 흉터이다 둑 위에서 묵은 편지를 태웠던 날은 귀에 걸려 찢어진 고무신처럼 질질
끌려 다녔다 날아간 연기가 남은 재보다 무거웠던가
사는 일은 산수유 꽃빛만큼 아득했으며
나는 천한 만큼 흉터를 늘리며 왔고 데인 데마다 산수유 한 그루씩이 자랐다 *
* 신용목시집[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어느 날 화분이 배달되었다
나에게도
땅이 생겼다 부드러운
흙, 나는
저기에 묻힐 것이다
화원 앞을 지나다 보면 유리창 너머
관짝들이 황홀하게 놓여 있다 아름다운 봉분처럼 자라는 나무들, 꽃들
스무 평의 적막에도 햇살과 바람이 흠모하듯 스며와
지금은 저기에 양란이 꽃을 피우고 등 구부린 시간이 신혼처럼 살고 있다
내 무덤은 향기로울 것이다
먼 나라의 춤을 푸는 나비처럼은 아니지만, 언젠가 꽃이 진 허공, 그 맑은
내 영혼을 띄워둘 것이다
저 둥긂을 안고 기다리면 아프지 않게 늙을 수 있겠다
거친 그리움도 이제는 자연사할 수 있겠다, 있겠다
어느 날
술 취한 발이 화분을 깨뜨리고 갔다
* 섬진강
노을 속으로 날아간 등 굽은 새가
늙은 강물에 밤의 얼굴을 씻는다
저 환하게 분신하는 날갯짓!
* 노을 만 평
누가 잡아만 준다면
내 숨 통째 담보잡혀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다른 데는 말고 꼭 저기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 만 평 갖고 싶다
그러고는 친구를 부르리
노을 만 평에 꽉 차서 날을 만한 철새
한 무리 사둔 친구
노을 만 평의 발치에 흔들려줄 갈대밭
한 뙈기 사둔 친구
내 숨에 끝날까지 사슬 끌려도
노을 만 평 사다가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가고 싶네
* 거미줄
아무리 들여다봐도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세월은 잠들면 九天에 가 닿는다
그 잠을 깨우러 가는 길은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더 많이 향하고
길 너머를 아는 자 남아 지도를 만든다
끌린 듯 멈춰 설 때가 있다
햇살 사방으로 번져 그 끝이 멀고, 걸음이 엉켜 뿌리가 마르듯 내 몸을 공중에 달아놓을 때
바람이 그곳에서 통째로 쓰러져도 나는
그 많은 길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무지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작은 것들 날아와 길 잃고 퍼덕일 때, 발이 긴 짐승
성큼 마지막 길을 가르쳐주는
나는 너무 큰 짐승으로 태어났다
* 지하철의 노인
일생을 눈감고 살아 온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간다
그 지팡이 위태로워
잡아주고 싶지만
이미 더는 내려가지 않을만큼
단단하게 바닥에 닿아있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싶어
안으로 깊어졌을
눈, 작은 몸 어디에서 녹아
풍금소리를 만드는지
그가 지날 때마다 노랫소리 떨어져
지팡이가 눌러놓은 자리를 동그랗게 메우고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나
구릉을 지날 때도
나는 발끝을 보지 않았다
가야 할 곳은 언제나 멀리있어
내 속에 노래를 키우지 못했다
폭 크게 서둘던 내 걸음 잠시
찬송가 밑에 세워둘 때
앞발의 뒤꿈치가
뒷발의 앞코를 넘지않으며
나아가는 풍금의 건반이 희다
문득, 세상의 빛이 사라져
모두가 비명을 쏟으며 발을 섞어도
노인은 홀로 유유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면서
노인이 지나간다
사람들은 비명을 안고 잠들어 있다
* 목련꽃 지는 자리
벼랑을 세워둔 마음의 끝
에서 헛디딘 사랑이 떨어져내리는 밤
들숨을 지피는 달이 떴다
제 그늘
스스로 낮추며 지는 꽃잎
표백되어 내리는 허공마다
구멍이 나고
숱한 어둠의 구멍
속으로 실족
하는
달
고요가 빨래처럼 마른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갔고 잘못 든 바람이
들었던 발을 내린다 발밑에서
풀려나는 어둠들 어둠이
내어준 길에 달빛 스미고 있을 동안 내
몸속 저울이 눈금을 옮기고 지진 없이 비탈지고 밤과
밤 사이로 이어진 꿈의 뒤편에 물 마른 자리처럼 소스라
치게 남아 있는
시간의 비명들
어둠을 길들이던 달빛이 어둠이 될 때까지
내가 깎은 내
마음의 절벽을 긁어내리는 손
톱
자
국
* 옥수수 대궁 속으로
뒤안을 돌아보는 정오, 어머니 묻어둔 몇 점 곡알이 어느덧 옥수수로 처마의 키를 잽니다. 서성이던 마음이 시절을 타느라 고향의 한때 귀 나간 그림처럼 걸려 있는데, 구렁이도 참새도 떠난 이곳에 한낮의 볕이 내려와 순하게 덧칠을 합니다. 이 하루 한세월쯤 그저 보내도 좋을 곡식들, 흙 속에 무엇을 두고 와서, 몸 밖으로 쿡쿡 열매을 밀어내고 옷수수 늙은 수염을 몸빼처럼 펄럭입니다. 그 펄럭임의 대궁 속, 대처를 돌아온 자식이 세월도 바람도 아닌 그 깊은 속을 보고 싶어 까칠한 마디 슬며시 쥐었을 때, 나는 그만 대궁마다 가득한 어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상을 차린 어머니가 마당까지 나서 때 잊은 막내를 불렀지만,나는 이미 어머니 캄캄한 몸 속에서, 간간이 늙은 음성이 어머니를 빠져나가 햇살에 머리를 받고 스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 실상사에서의 편지
감기에 종일을 누웠던 일요일 그대에게 가고 싶은 발걸음 돌려 실상사를 찾았습니다 자정의 실상사는 겨울이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천 년을 석등으로 선 石工의 살내음 위로 별빛만 속없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상처도 없이 낙엽은 섬돌에 걸려 넘어지고 석탑의 그림자만 희미하게 얼어가는 이 거역 없는 佛心의 뜰 안에 서서 < 여기 鐵佛로 支脈을 잡아 새나가는 國運을 막으리라 > 정녕 그대를 사랑한 것은 내 생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은빛 시린 서리처럼 오랜 세월 말없이 견디는 계절의 눈빛마다 속 졸이며 현상되는 기억을 대웅전 연꽃무늬 문살에 새기다가 사람의 가슴에도 깊이가 있다면 그대보다 멀리 있는 그대의 그리움 또한 아득히 잠기겠지요 실상사 긴 담장을 품고 산허리 꽃 피고 눈 내릴 때마다 더러는 못 참아 술값도 치러가며 떠나온 그 자리 여기 실상사 언제는 그립지 않은 시간이 있었냐며 풍경 소리는 바람의 몸의 더듬고 있었습니다
* 다비식
바위 위에 바위보다 한 발은 더 바다로 나가 석양볕에 늙은 뼈를 태우는 해송을 본다
서해 변산
물 위에
하늘의 다비식
가지 저 끝에서 타올랐으니 그래서 어두웠으니
휘어진 허리 감고 사리 같은 달과 별 더러 나오리
날마다, 그러나 파도 끝 붉게 젖은 때
또 한 줄 바람을 긋고 갈라지는 채석강
* 겨울 부석사
이 산사 고요를 덖는 풍경소리 한 숟갈만 떠 당신의 마른 입술에 후후 불어주고 싶었습니다
별빛을 대신하여 서성이던 눈발들이 하늘 가득 사태로 져 어느 모퉁이 불 나간 외등처럼 떨고 있을 때
그을음 돌들이 하늘에 떠서는 마음을 잃고 그대로 먹장 구름이 되었는데요 하느작하느작 검은구들을
지고 오는 지게꾼의 걸음이 눈발처럼 조심스러워 어둠은 가만히 당신 시린 이마를 짚고 갑니다
모든 풍경이 한 장 그림자에 가려 캄캄해지는군요 고작에 가닥 없는 그리움이 우리를 예까지 이끈 것처럼
슬몃 갈아엎는 한 막의 공기가 우리를 깎은 난간에 외롭게 합니다 그리하여 벗은 나무마다 매달린 검은
먹의 마음은 어느 시절을 갈아 묽은 가지 끝 당신의 속눈썹 하나 그릴 수 있을는지요 이도 저도 아닌 먼 능선을
짊어지고 산은 산대로 추녀는 추녀대로 희미한 앞섶 강물로 지는 것을 풍경소리로만 노를 저어
당신에게 가는 물살은 또 물살대로 가장 먼 곳의 눈발처럼 한 숟갈씩 세월을 떠 넘깁니다
* 첫눈
가을의 그늘로 눈이 내린다
쌓일 수 있는 곳마다
내리는 세월들이 희다
* 봄 물가를 잠시
봄 물가를 잠시 머뭇거렸는데
햇살이 바지를 벗고 내려와 뿌려놓은 개나리 그 노란숨의 입김이 드세 설사를 할 것 같다
비나 내려야 고이는 못물에는 뱀이 물살이 되어 흐름을 만든다
봄볕에 주름이 잡힌다 그림자가 방죽을 잘못 디뎌 꺾여진 것을
언제부턴가 내 발목은 저 높이를 넘어서지 못한다
깨금발의 아이가 뛰어간다
외발로도 서는
환한 얼굴의 망울짐
지팡이의 노인이 걸어간다
죽은 나무를 짚고
남은 목숨의 꽃핌
속이 불편하다 노란 꽃덤불 속에서 일제히 쏟아져나온 눈망울들이 고여 있는 나를 쳐다본다
내 머리 속엔 언제쯤 그 너비를 건너간 뱀이 알을 슬었는지 거품처럼 허옇게 자라고 있다 너무 오래
머뭇거려다 저것들의 서식지가 되기까지
* 저녁에
사선(斜線)으로 떨어지는 저녁, 옆구리에 볕의 장대를 걸치고 새가 운다//
저녁 하늘은, 어둠이 갇힌 볕의 철창//
저녁 새소리는//
허공에 무수히 매달린 자물통을 따느라//
열쇠꾸러미 짤랑대는 소리//
저녁 감나무에, 장대높이로 넘어가는 달
* 별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이빨들, 뾰족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罪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罪가 나를 씻어주겠다 *
* 민들레
가장 높은 곳에 보푸라기 깃을 단다
오직 사랑은
내 몸을 비워 그대에게 날아가는 일
외로운 정수리에 날개를 단다
먼지도
솜털도 아니게
그것이 아니면 흩어져버리려고
그것이 아니면 부서져버리려고
누군가 나를 참수한다 해도
모가지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
* 신용목시집[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 신용목시인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2000년 [작가세계]신인상 당선,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 ,2008년 제2회 시작문학상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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