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그리운 바다 성산포 1~40 - 이생진

효림♡ 2009. 4. 22. 08:45

*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1. 바다를 본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2. 설교하는 바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3. 끊을 수 없다
성산포에서는
끊어도 이어지는
바다 앞에서
칼을 갈 수 없다

4. 모두 버려라
성산포에서는
지갑을 풀밭에 던지고
바다가 시키는 대로
옷을 벗는다


5. 바다의 시녀
성산포에서는
바람은 바다의 시녀
사람은 바다의 곤충이고
태양은 바다의 화약인데
산만은 제 고집으로
한 천년 더 살리라


6. 산
성산포에서는
언젠가 산이 바다에 항복하고
산도
바다처럼 누우리라


7. 바다의 노예 

성산포에서는
그 육중한 암벽이
바다의 노예임을 시인하고
자기네들의 멸망을 굽어본다


8. 만년필
성산포에서는
관광으로 온 젊은
사원 하나가
만년필에
바닷물을 담고 있다


9. 생사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도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지 않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10. 자살

성산포까지 와서
자살 한 번 못하고 돌아오는 비열
구기구기 두었다가
휴지로 쓸 것인가

 

11. 절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12. 술에 취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13. 바다의 성욕
성산포에서는
온종일 산삼을 먹어도
산만큼 성욕이 일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해삼을 아무리 먹어도
바다만큼 성욕이 일지 않는다

14. 증거
성산포에서는
바다는 한 개의 물
나는 한 개의 물에서
수 만 가지 소리가 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하늘 되려다
실패한 증거도 있다

15. 색맹

성산포에서는
푸른색 이외에는
손대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색맹일지라도
바다를 빨갛게
칠할 순 없다


16. 여유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 데서
더 깊은 데서
더 여유있게 산다

17. 수 많은 태양
아침 여섯시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은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필거야

아침 여섯시
태양은 수 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18. 감탄사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19. 권리
성산포에서는
둘로 막아놓은 권리를 넘어
바다는 육지를
육지는 바다를
제 것 삼으려 한다

20. 누가 주인인가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를 보고 있는 고립
성산포에서는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 이외의 주인을 모르겠다
 
 

21. 생활비
성산포에서는
어떤 명목으로도
성산포는 그들의 재산
소라는 그들의 시라기 보다
그들의 혈장(血漿)
해삼은 그들의 장수라기보다
그들의 수당
성산포에서는
일출도 그들의 생활비

22. 이해

성산포에서는
살림을 바다가 맡아서 한다
교육도
종교도
판단도
이해도

성산포에서는
바다의 횡포를 막는일
그것으로 둑이 닳는다

23. 풍요
성산포에서는
그 풍요 속에서도
갈증이 인다
바다 한가운데에
풍덩 생명을 빠뜨릴 순 있어도
한 모금 물을 건질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바다가
사방에 흩어져 산다


24. 바다를 담을 그릇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25. 바다로 가는 길
돈을 모았다
바다를 보러간다
상인들이 보면
흉볼 것 같아서
숨어서 간다

26. 화장하는 여인
바다 앞에서
거울을 보며
눈썹을 그리는 여인
바다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아서
빙그레 웃었다

27. 귀신같은 인상
첫 눈엔 무섭다가
차츰 친해져 버리고

그 절벽
그 굴곡
그 무식
그 잔인

첫 눈엔 무섭다가
차츰 친해져 버리고


28. 기암절벽

한자리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는
기암절벽
이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도 되었는데

29. 입
바다는 입이 하나
찢어도 찢어도
말이 나오는
입이 하나


30. 바다의 오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 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31. 해삼
일출봉 입구에서
해삼 파는 아주머니
손을 잡아당기며
해삼 먹으라고
기운에 좋으니
먹고 가라고
내가 바다 앞에서
기운을 내면 얼마나 내나
해삼을 바다에 주어
바다보고 더 기운내라지

32. 감(感)

바다가 산허리에 몸을 부빈다
산이 푸른 치마를 걷어 올리며
발을 뻗는다
육체에 따뜻한 햇살
사람들이 없어서
산은 산끼리
물은 물끼리
욕정에 젖어서
서로 몸을 부빈다

33. 갈매기

바람이 우우 몰려와
갈매기 똥구멍에
바람을 넣는다
갈매기들 신이나서
물 위를 거닐다
물위를 나르고
이번엔 갈매기가
우우 몰려가
바다에 바람을 넣는다

34. 여관집 마나님
"어딜 가십니까?"
"바다 보러 갑니다"
"방금 갔다오고 또 가십니껴?"
"또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밤새 들락날락 바다를 보았다
알몸인 바다가 차가운 바깥에서
어떻게 자는가
밤새 들락날락
바다를 보았다

35. 아침 낮 그리고 밤
오늘 아침
하늘은 기지갤 펴고
바다는 거울을 닦는다
오늘 낮
하늘은 낮잠을 자고
바다는 손뼉을 친다
오늘 저녁
하늘은 불을 끄고
바다는 이불을 편다

36. 고향
나는 내일 고향으로 가는데
바다는 못간다
먼 산골에서 이곳에 온 후
제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다는 그대로 제자리 걸음
나는 내일 고향으로 가는데
바다는 못간다

37. 저 세상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38. 수평선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

39. 패배
일어설듯
일어설듯
쓰러지는 너의 패배
발목이 시긴 하지만
평면을 깨뜨리지 않는 승리
그래서 네 속은 하늘이
들어앉아도 차지 않는다

40. 승리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아니면 일제히 패배하라
그러면 잔잔하리라
그 넓은 아우성으로
눈물을 닦는 기쁨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 이생진 시집[그리운 바다 성산포]-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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