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용택 시 모음 2

효림♡ 2009. 4. 21. 08:17

* 시를 쓰다가 - 김용택 

시를 쓰다가

연필을 놓으면

물소리가 찾아오고

불을 끄면

새벽 달빛이 찾아온다

내가 떠나면

꽃잎을 입에 문 새가

저 산을 넘어와

울 것이다 *

 

* 달

앞산에다 대고 큰 소리로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소리로
당신이 보고 싶다고 외칩니다
그랬더니
둥근 달이 떠올라 왔어요
 

 

* 봄날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

 

* 푸른 하늘

오늘은 아무 생각 없고
당신만 그냥 많이 보고 싶습니다 *

 

* 그리움

해질녘에

당신이 그립습니다

잠자리 들 때

당신이 또 그립습니다. *

 

* 일

앞산에 꽃이 지누나 봄이 가누나
해마다 저 산에 꽃 피고 지는 일
저 산 일인 줄만 알았더니
그대 보내고 돌아서며
내 일인 줄도 인자는 알겠네

 

* 산벚꽃

저 산 너머에 그대 있다면
저 산을 넘어가 보기라도 해볼 턴디
저 산 산그늘 속에
느닷없는 산벚꽃은
웬 꽃이다요

저 물 끝에 그대 있다면
저 물을 따라가보겄는디
저 물은 꽃 보다가 소리 놓치고
저 물소리 저 산허리를 쳐
꽃잎만 하얗게 날리어
흐르는 저기 저 물에 싣네. * 

 

* 그리운 우리

저문 데로 둘이 저물어 갔다가       
저문 데서 저물어 둘이 돌아와
저문 강물에
발목을 담그면
아픔없이 함께 지워지며
꽃잎 두송이로 떠가는
그리운 우리 둘

 

* 강가에서

강가에서
세월이 많이 흘러
세상에 이르고 싶은 강물은
더욱 깊어지고
산그림자 또한 물 깊이 그윽하니
사소한 것들이 아름다워지리라
어느날엔가
그 어느날엔가는
떠난 것들과 죽은 것들이
이 강가에 돌아와
물을 따르며
편안히 쉬리라

 

* 미처 하지 못한 말
살다가
이 세상을 살아가시다가
아무도 인기척 없는
황량한 벌판이거든
바람 가득한 밤이거든
빈 가슴이, 당신의 빈 가슴이 시리시거든
당신의 지친 마음에
찬바람이 일거든
살다가, 살아가시다가......

 

* 별빛 
당신 생각으로
당신이 내 마음에 가득 차야
하늘에 별들이
저렇게 빛난다는 것을
당신 없는 지금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 이별
서리 친 가을 찬물을
초승달같이 하이얀 맨발로
건너서 가네 *

* 나도 꽃
수천 수만 송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납니다
생각에 생각을 보태며
나도 한송이 들국으로
그대 곁에
가만가만 핍니다

 

* 나비는 청산 가네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서 나는 섰네

내 맘에 한번 핀 꽃은
생전에 지지 않는 줄을
내 어찌 몰랐을까
우수수수 내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사랑에서 돌아선
내 눈물인 줄만 알았지
그대 눈물인 줄은
내 어찌 몰랐을까
날 저무는 강물에 훨훨 날아드는 것이
꽃잎이 아니라
저 산을 날아가는 나비인 줄을
나는 왜 몰랐을까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 나는 서 있네 *

* 김용택시집[그 여자네 집]-창비

 

* 길

이 세상에
나만 아는 숲이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가는 지고
눈 내리고 바람이 불어
차곡차곡 솔잎 쌓인
그 고요한 숲길에서
오래 이룬
단 하나
단 한번의 사랑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람입니다


* 내소사 가는 길
서해 바다
내소사 푸른 앞바다에
꽃산 하나 나타났네
달려가도 달려가도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또 산을 넘어
아무리 달려가도
저 꽃산 눈 감고
둥둥 떠가다
그 꽃산 가라앉더니
꽃잎 하나 떴네
꽃산 잃고
꿈 깨었네

 

하루
어제는 하루종일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들이 멀리 흔들리고
나는
당신에게 가고 싶었습니다
당신 곁에 가서
바람 앉는 잔 나뭇가지처럼
쉬고 싶었습니다
어제는 하루종일
내 맘에 바람뿐이었습니다

 

* 죄
우루루 쾅쾅
천둥 번개 친다
알았다 알았어
그만두리라
내가 내 죄를 알았다
 

 

* 지금 내 마음은
그대 마을 정자나무에
달이 걸리거든
나인 줄 알으소서
달 뜨는 지금 내 마음은
깊은 산 속 명경 같은
샘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당신
세상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그보다 더 따뜻할 수 있는
그보다 더 빛나는 말이 있을 리 없겠지요
당신......

 

* 사랑의 편지
당신의 아름다운 편지
잘 받았습니다
막 피어나는 꽃잎처럼 떨리는
당신의 속마음이
손끝에 파르르 묻어 옵니다
눈 들어
봄이 오는 산천을 봅니다
이 봄
당신에게로 가는 길 하나
지금 열립니다
새 나라로 가는 길이지요

 

노을 밑에서
노을이 붉은 하늘 뒤로 하고 걸었습니다
당신이
당신 피 걸러
저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그리셨지요
그러셨지요?
나도,
내 피도 시방 저렇게 물들어가요
 

 

* 초겨울 편지
앞산에
고운 잎
다 졌답니다
빈 산을 그리며
저 강에
흰눈
내리겠지요

눈 내리기 전에
한번 보고 싶습니다
 *

 

* 애인 
이웃 마을에 살던 그 여자는
내가 어디 갔다가 오는 날을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마을 앞을 지날 때를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집 앞을 지날 때쯤이면 용케도 발걸음을 딱 맞추어가지고는
작고 예쁜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대문을 나서서
긴 간짓대로 된 감망을 끌고
딸가닥딸가닥 자갈돌들을 차며

미리 내 앞을 걸어갑니다  
눈도 맘도 뒤에다가 두고 
귀도, 검은 머릿결 밖으로 나온 작고 그리고 희고 또 이쁜 귀도 다 열어놓고는
감을 따러 갑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저만큼 서 있는 길
샛노란 산국이 길을 따라 피어 있는 길
어쩌다가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그 여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높이높이 올라가서는 감을 땁니다
월남치마에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 여자는 내가 올 때까지
소쿠리 가득 감이 넘쳐도 쓸데없이 감을 마구 땁니다
나를 좋아한 그 여자
어쩔 때 노란 산국 꽃포기 아래에다 편지를 감홍시로 눌러놓은 그 여자
늦가을 시린 달빛을 밟으며 마을을 벗어난 하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느티나무에다 등을 기대고 달을 보며 환한 이마로 나를 기다리던

그 여자
내가 그냥 좋아했던 이웃 마을 그 여자

들 패랭이 같고
느티나무 아래 일찍 핀 구절초꽃 같던 그 여자
가을 해가 이렇게 뉘엿뉘엿 지는 날
이 길을 걸으면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살아나와
저만큼 앞서가다가 뒤돌아다보며
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사귀같이 살짝 낯을 붉히며 웃는,  
웃을 때는 쪽니가 이쁘던 그 여자


우리나라 가을 하늘같이 오래 된 그 여자 * 

* 김용택시집[그 여자네 집]-창비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운 바다 성산포 1~40 - 이생진   (0) 2009.04.22
이용악 시 모음  (0) 2009.04.21
임영조 시 모음  (0) 2009.04.20
이성복 시 모음  (0) 2009.04.15
박인환 시 모음  (0) 200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