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인환 시 모음

효림♡ 2009. 4. 15. 07:53

*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민음사 

 

*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 고향에 가서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繪畵)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엔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와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 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뿐이다


비 내리는 경사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工兵)이
나에게 손짓을 해준다 
*

 

* 얼굴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旗)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 술보다 독한 눈물

눈물처럼 뚝뚝 낙엽지는 밤이면 
당신의 그림자를 밟고 넘어진 

외로운 내 마음을 잡아 보려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그렇게 이별을 견뎠습니다 
맺지 못할 이 이별 또한 운명이라며 
다시는 울지 말자 다짐 했지만 
맨 정신으론 잊지 못해 
술을 배웠습니다 
사랑을 버린 당신이 뭘 알아 
밤마다 내가 마시는건 
술이 아니라 
술보다 더 독한 눈물이 이였다는 것과 
결국 내가 취해 쓰러진건 
죽음보다 더 깊은 그리움 이였다는 것을.....

 

* 전원(田園) 
1
홀로 새우는 밤이었다.
지난 시인의 걸어온 길을
나의 꿈길에서 부딪쳐 본다.
적막한 곳엔 살 수 없고
겨울이면 눈이 쌓일 것이
걱정이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모여들고
한 칸 방은 잘 자리도 없이
좁아진다.
밖에는 우수수
낙엽 소리에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2

풍토의 냄새를
산마루에서
지킨다.
내 가슴보다도
더욱 쓰라린
늙은 농촌의 황혼
언제부터 시작되고
언제 그치는
나의 슬픔인가.
지금 쳐다보기도 싫은
기울어져 가는
만하(晩夏).
전선 위에서
제비들은
바람처럼
나에게 작별한다 .

3
찾아든 고독 속에서
가까이 들리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다.
창을 부수는 듯
별들이 보였다.
7월의
저무는 전원
시인이 죽고
괴로운 세월은
어디론지 떠났다.
비 내리면
떠난 친구의 목소리가
강물보다도
내 귀에
서늘하게 들리고
여름의 호흡이
쉴 새 없이
눈앞으로 지닌다 *

4
절름발이 내 어머니는
삭풍에 쓰러진
고목 옆에서 나를
불렀다.
얼마 지나
부서진 추억을 안고
염소처럼 나는
울었다.
마차가 넘어간
언덕에 앉아
지평에서 걸어오는
옛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생각이 타오르는
연기는
마을을 덮었다. *

* 박인환전집-실천문학사



* 박인환(朴寅煥)시인
-1926~1956 강원도 인제 사람 
-1946년 국제신문에 [거리]발표,1947년 신천지에 [남풍] 발표
-1949년 김경린. 임호권. 박인환. 양명식 등 5인의 합동 시집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시집  [박인환시선집][목마와숙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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