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성복 시 모음

효림♡ 2009. 4. 15. 07:55

* 아주 흐린 날의 기억 - 이성복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 그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占)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 이성복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문지

 

* 사슬

내가 당신 속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 나는 아직 당신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웃는 것 같았고 우는 것 같았고 온갖 슬픔과 기쁨이 하나로 섞인

그 소리는 나의 머리끝 발끝을 끝없이 돌아나갔습니다 그 소리에 잠겨 나도

당신도 잊혀지고 헤아릴 수 없는 윤회의 고리들이 반짝였습니다

반짝임 사이로 어둠이 오고 나도 당신도 남이었습니다

 

* 입술
우리가 헤어진 지 오랜 후에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잊지 않겠지요 오랜 세월 귀먹고 눈멀어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알아보겠지요 입술은 그리워하기에 벌어져 있습니다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닫히지 않습니다 내 그리움이 크면 당신의 입술이 열리고 당신의 그리움이 크면 내 입술이 열립니다 우리 입술은 동시에 피고 지는 두 개의 꽃나무 같습니다 *

 

* 두 개의 꽃나무

당신의 정원에 두 개의 꽃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잎이 예뻤고 다른 하나는 가지가 탐스러웠습니다

당신은 두 개의 꽃나무 앞에서 서성거리는 나를 보고

그 중 하나는 가져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두 개의 꽃나무 다 갖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뜰에

심고 다른 하나는 문 앞에 두고 싶었습니다

내 다 가져가면 당신의 정원이 헐벗을 줄 알면서도

허전한 당신 병드실 줄을 알면서도.....

당신의 정원에 두 개의, 꽃나무가 있었습니다 두 개의

꽃나무 사이, 당신은 쓸쓸히 웃고만 계셨습니다 *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 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 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을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

 

* 아득한 것이 빗방울로

아득한 것이 빗방울로 얼굴을 스치다

아득한 것이 또 한 번 빗겨 내리며

그곳을 스치다

 

그래 나도 간다 몸져 누운 사람들 손발을 밟고

머리 타넘어 나도 간다 반지처럼 빛나는 치욕의

긴 긴 사슬을 끌며

 

개를 만나면 개를 타고간다  깨벌레를 만나면

깨벌레에 업혀간다 아득한 것 살던 곳으로 간다

가서, 아득한 치욕 뿌리 내릴까

 

지금은 빗물 고인 길바닥의 그림자로 간다 

 

*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어떤 영혼들은
푸른 별들을 갖고 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어떤 영혼들은…]

어떤 순결한 영혼은 먹지처럼 묻어난다. 가령 오늘 점심에는 사천 원짜리 추어탕을 먹고 천 원짜리 거슬러 오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까박까박 조는 남루의 할머니에게 ‘이것 가지고 점심 사 드세요’ 억지로 받게 했더니, 횡단보도 다 건너가는데 ‘미안시루와서 이거 안 받을랩니다’ 기어코 돌려주셨다.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내놓은 내가 그제서야 부끄러운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섭섭다거나 언짢은 기색 아니었다. 어릴 때 먹지를 가지고 놀 때처럼, 내 손이 참 더러워 보였다
* 이성복시집[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 어두워지기 전에

1. 어두워가는 산을 가리키며 당신이

아니, 저기 진달래가.....저기도, 저 너머에도....

당신이 놀라 가리킬 때마다 어둠과 피로 버무린 꽃이

당신 손끝에서 피어났습니다

 

그때 당신이 부르기만 하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서

나는 처음 꽃피어날 것 같았습니다 

 

2. 꽃나무들은 물감을 흘리며

일렬로 걸어갔습니다

소박한 연등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갔던가요

혼례의 옷에 죽음의 빛이 묻어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사람들은  흰빛 향기로 웃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그대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저의 눈빛은 흐려지고

늘어진 꽃나무 사이 그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 이성복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 비 1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온몸을 적십니다

 

* 비 2  

머리맡에 계시는 것 같아 깨어보면 바깥에 계십니다 창을 열고 내다보면
빗줄기 너머에 계십니다 지금 빗줄기 사이로 달려가면 나 없는 사이 당신은
내 방에 들어와 뽀오얗게 한숨이나 짓다가 흐트러진 옷가지랑, 이부자리랑
가지런히 매만지다가 젖어 돌아오는 내 발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가요?

 

* 바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 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

* 모래내.1978년  

1. 하늘 한 곳에서 어머니는 늘 아팠다

밤이 으슥하도록 전화하고 깨자마자

누이는 또 전화했다 婚姻날이 멀지 않은 거다

눈 감으면 노란 꽃들이 머리 끝까지 흔들리고

時間을 모래 언덕처럼 흘러내렸다

아, 잤다 잠 속에서 다시 잤다

모았다, 달려드는, 눈 속으로, 트럭, 거대한

 

무서워요 어머니

---- 얘야, 나는 아프단다

 

2. 어제는 먼지 앉은 기왓장에

하늘색을 칠하고

오늘 저녁 누이의 결혼 얘기를 듣는다

꿈속인 듯 멀리 화곡동 불빛이

흔들린다 꿈속인 듯 아득히 汽笛이 울고

웃음 소리에 놀란 그림자 벽에 춤춘다

 

노새야, 노새야 빨리 오렴

어린 날의 내가 스물 여덟 살의 나를 끌고 간다

산 넘고 물 건너 간다 노새야, 멀리 가야 해

 

3. 거기서 나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기차 소리 목에 걸고

흔들리는 무꽃 꺾어 깡통에 꽂고 오래 너는 살았다

더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 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산 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전에 울린 종소리 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 꽃피는 시절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

* 이성복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쌀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 이성복시집[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 이성복(李晟馥)시인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1977년 문학과지성-[정든 유곽에서] 등단 , 1982년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남해 금산][그 여름의 끝][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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