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임영조 시 모음

효림♡ 2009. 4. 20. 09:35

* 우담바라 - 임영조  

청계사 극락보전 삼신불 앞에
낯선 새떼들 왁자지껄 붐빈다
네가 곧 부처다
네 마음이 절이다
아무리 일어줘도 못 알아들으니
답답하신 부처는 문뜩 우담봐라!
스스로 이마 찢고 꽃을 피웠다
앞뜰 냉이 꽃다지도 덩달아 피고
저 아래 마을에선 입이 싼
풀잠자리 웃음소리 자지러지고
오늘도 무사히 봄날은 간다

 
* 3월  

밖에는 지금

누가 오고 있느냐
흙먼지 자욱한 꽃샘바람
먼 산이 꿈틀거린다 
 

나른한 햇볕 아래
선잠 깬 나무들이 기지개 켜듯
하늘을 힘껏 밀어올리자
조르르 구르는 푸른 물소리
문득 귀가 맑게 트인다

 

누가 또 내 말 하는지
떠도는 소문처럼 바람이 불고
턱없이 가슴 뛰는 기대로
입술이 트듯 꽃망울이 부푼다 
 

오늘은 무슨 기별 없을까
온종일 궁금한 3월
그 미완의 화폭 위에
그리운 이름들을 써놓고
찬란한 부활을 기다려 본다 *

 

* 고도(孤島)를 위하여  
면벽 100일!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 표지 그려진 금표비(禁標碑) 꽂고
한 십 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 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達磨)가 될까?

그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體位) 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세상과 먼 절벽 섬 될까?
한 평생 모로 서서
웃음 참 묘하게 짓는 마애불(磨崖佛) 같은

 

* 연을 날리며

연을 날린다
눈오는 설날 아침
바람이 잘 드는 언덕에 올라
맑은 꿈을 배접한 연을 띄운다

내 가슴 속 얼레에 감긴
오랜 연모의 질긴 실꾸리
하얀 그리움 스르르 풀어
그대 사는 하늘로 연을 날린다

당기면 당길수록 달아나는 새
끊길 듯 이어지는 정처럼
가늘한 인연의 실 끝을 물고
하늘 멀리 가물가물 치솟는 새여
내 몸 속 핏줄까지 물고 가다오

서설이 내려도 추운 이를 위하여
진정 외롭고 슬픈 이를 위하여
시린 손 호호 불며 얼레를 풀면
한 마리의 상서로운 학같이
튼실한 현을 차고 뜨는 내 사랑

아직도 소식없는 그대여
내가 띄운 연을 보거든
먼 그대 안부를 묻는 줄 알라
내 사무치는 그리움 모조리 풀어
그대 사는 하늘로 띄운 줄 알라

 

* 갈대는 배후가 없다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 대책 없는 봄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에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다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려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건 매화년이고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낙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겁 없이 멋대로 발랑까진 십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이 환하더군요
몰래 숨어 꼬나문 담배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절입니다
나로서는 대책 없는 봄날입니다 *

 

* 배롱나무 아래서

어제 피운 바람꽃 진다
팔월염천 사르는 농염한 꽃불
밤 사이 시들시들 검붉게 져도
또다른 망울에 불을 지핀다
언제쯤 철이 들까? 내내
자잘한 웃음소리 간드러지는
늙은 배롱나무의 선홍빛 음순
날아든 꿀벌을 깊이 품고 뜨겁다
조금 사리 지나고 막달이 차도
좀처럼 下血이 멎지 않는 꽃이다
호시절을 배롱배롱 보낸 멀미로
팔다리 휘도록 늦바람난 꽃이여
매미도 목이 쉬어 타는 말복에
생피같이 더운 네 웃음 보시한들
보릿고개 맨발로 넘다가 지친
내 몸이 받는 한끼 이밥만 하랴
해도, 오랜 기갈을 견뎌온 나는
석달 열흘 피고 지는 현란한 修辭
네 새빨간 거짓말도 다 믿고 싶다
그 쓰린 기억 뒤로 가을이 오고
퍼렇게 침묵하던 벼이삭은 패리라
처서 지나 한로쯤 찬이슬 맞고
햇곡도 다 익어 제 무게로 숙일 때
나는 또 한 소식을 기다려보리라
보름 넘어 굶다가 밥상을 받듯
받기 전에 배부른 배롱나무 아래서

 

* 도꼬마리씨 하나

멀고 긴 산행 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 운주사  와불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키 크고 마음 착한 미남 석공과 키 작지만 요염한 공주가 한가윗날 밤 우연히 서로 눈맞아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행복한 유부남 유부녀라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사랑이 날로 깊어질수록 한편 괴로워했다 허나 그들은 마침내 야밤도주를 모의하고 배 한 척을 마련하려 백방으로 뛰었다 하늘도 그 애틋한 순애에 감복하여 이 세상 아닌 딴 세상에 가서 행복하게 살라고 구름배 한 척을 내려주었다

그들은 사랑에 부픈 돛을 올리고 세상 밖으로 밤낮없이 노를 저었다 그러나 비바람 몰아치던 칠석날 저녁 그들의 배는 북두칠성 모서리에 부딪쳐 화순군 도암 들녁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들의 육신과 배의 잔해는 땅에 떨어지면서 크고 작은 부위로 굳어 도처에 널려졌다 하늘은 덫으로 놓아둔 북두칠성에 좌초된 것을 못내 가엾게 여겨 칠석날 저녁이면 일곱별을 내려 곡하게 하고 비를 뿌렸다 그리고 천상의 석공들을 내려보내 천일동안 밤도와 그들의 석상을 세우게 하고 배의 잔해로 천불천탑을 완성하라 명했다

드디어 완성된 석상을 막 세우려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새벽닭이 울었다 그 소리에 놀란 석공들은 그만 서둘러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운주사 영구산 마루 양지녁에는 그 석공과 공주가 금실 좋은 와불로 누워 세상 밖으로 갈 구름배 한 척 기다리고 있다 곧 나란히 일어날 듯 하체 약간 비스듬히 쳐든 채

치정도 지극하면 성불하는가?

 

* 고등어

등짝에 해조음 문신 알록달록한
간고등어 한 마리가 점잖게
가스레인지 그릴 속에 누워 있다
불꽃이 온몸을 지글지글 구워도
오늘 같은 다비를 기다렸다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다
평생을 무슨 공부로 수신했길래
시뻘건 연옥에서도 고등어는
열반에 들듯 태연할 수 있을까
파란만장 난바다를 헤쳐온 생이 못내
서럽고 억울할 텐데, 육신을 어찌
저토록 마음 편히 보시할 수 있을까
뻣뻣한 몸이 똑 서슬 퍼런 칼 같다
이판사판! 너 아니면 나 죽기식
피비린내 파다한 복수를 꿈꾸는 칼?
죽어서도 몸가짐 의젓한 고등어가
설마 누구를 찌를 마음을 먹었으랴
그렇게 본 내 마음이 멋쩍다
다 익은 살을 곧 뜯어먹을 나보다
등급이 몇 수쯤 위라는 생각
그래서 이름까지 高等魚? *

* 오광수엮음[시는 아름답다]-사과나무

 

* 동백꽃 패설

법당 앞 돌계단 사이에 두고

어린 동백 두 그루 마주 서 있다

새파란 잎들이 공양 받은 햇살을

키질하듯 살랑살랑 까분다. 금세

분분한 소문 같은 금빛 가루 부시다

그 무슨 법문 주고받길래

온통 벌게진 낯으로 키들거릴까

얼마나 솔깃하고 귓맛이 나면

노란 목젖까지 다 보이도록

꽃술을 활짝 열고 자지러질까

용맹 정진하라, 땡그렁!

아니면 파계하라, 땡그렁!

부연 끝 풍경이 수시로 경을 쳐도

동백꽃은 한사코 입 다물 줄 모른다

참 농후하고 불경스런 수작을

불당에서 내내 내려다보는

부처님도 손들고 조용하시다

저 철없이 고운 사미들 돌연

옷 벗고 정말 파계하면 어쩌나

절 버리고 혹 내게 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가슴 설레는

볼수록 낯뜨겁고 황홀한

동백꽃 패설 *

 

* 저승꽃

핸들 잡고 차 몰다 본다

가을볕에 선명히 드러난 내 손

드문드문 손등에 핀 꽃들을 본다

이젠 탐욕도 열도 식는 나이에

어느 날 문득 크고 작게

혹은 흐리거나 진하게 핀 꽃

누가 심지 않고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피어나 짙어지는 꽃이다

난생 처음 보고도 서로 친한 듯

그래도 왠지 마주보기 어색해

모르는 척 짐짓 외면하고 싶은 꽃

내 살이 그만 흙과 친하려는지

꽃 색깔도 흡사 흙빛 닮았다

마음에 보푸라기 일어나듯

손등부터 넌지시 번지는 무늬

내 생의 말미에 댄 끝동 같은 꽃

하! 나는 여태 이 꽃을 보러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왔구나!

내 몸의 허허로운 양달에

이승에서  마지막 피워보는 꽃

허나 왠지 섭섭하고 쓸쓸한

그래서 내보이기 싫은 꽃

누가 파종했을까? *

 

화려한 오독 
장마 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행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로 쿡쿡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대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隱者가 몸소 나와 배밀이 하랴
쉬파리떼 성가신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肉頭文字로 *
* 임영조시집[시인의 모자]-창비

 

* 민들레 연가 
볼장 다 본 4월도 막가는 하순
나무들 모두 꽃잎 진 상처마다
메롱메롱 푸른 혀를 내밀어
내 하초에도 용용 약 오르는 날
홀연 다시 만난 여자여
노란 파라솔 생글생글 돌리며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까지 찾아온
늦바람난 시골뜨기 꽃이여
아직도 너는 화사하고 젊구나
늘씬한 키에 눈웃음 삼삼하고
간드러진 사투리도 여전하구나
그게 언제였더라?
고향의 동구밖 고샅길에서
남 몰래 가슴 두근 마지막 본 게
나는 인제 네 출신을 묻지 않으마
네 아픈 과거도 묻지 않으마
이번 생만으로도 나는 지쳤다
그리하여 네 깊은 씨방 속
그 아늑한 어둠 속에 들어가
간절하고 빛부신 은유로 남고 싶다
내 가슴속 허허로운 뒤란엔
똑 너 닮은 딸 하나 낳아놓고
마실 가듯 이승을 뜨고 싶다
육신을 허물어 중심에 들듯
하얀 털모자 벗어 흔들며
너와 함께 두둥실 세상 밖으로.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랜덤하우스중앙

 

* 임영조시인
-1945~2003 충남 보령 사람
-1970년 [월간문학], 197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1995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갈대는 배후가 없다][귀로 웃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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