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종해 시 모음

효림♡ 2009. 4. 9. 08:36

* 항해일지 28 -한려수도 물길에 사량도가 있더라  - 김종해
사량도 눈썹 밑에 노오란 평지꽃이
눈물처럼 맺힌 봄날
나도 섬 하나로 떠서
외로운 물새 같은 것이나
품어주고 있어라
부산에서 삼천포 물길을 타고
봄날 한려수도 물길을 가며
사랑하는 이여
저간의 내 섬 안에 쌓였던 슬픔을
오늘은 물새들이 날고 있는
근해에 내다 버리나니
우는 물새의 눈물로
사량도를 바라보며
절벽 끝의 석란으로 매달리나니
사랑하는 이여
오늘은 내 섬의 평지꽃으로 내려오시든지
내 절벽 끄트머리
한 잎 난꽃을 더 달아주시든지
 

 

* 바람 부는 날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 김종해시집[별똥별]-문학세계사

 

* 가을 산새 
새끼 네 마리 데리고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가을 산새

가을이 되니까
저녁 햇살이 밥으로 보이니까
우리집 찔래나무 덤불 속에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서오릉 길 너머
봉산에서 내려온 가을 산새가
뭐라고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다
어린날 귓속에 쟁쟁 울리는
엄마새 소리
종해야, 죽 먹고 자 !
죽 먹고 자!
굶고 자는 아기새 위로
엄마새가 맨 앞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

 

* 찔레꽃 열매는 눈 속에서 더 붉다

찔레꽃 열매는 눈 속에서 더 붉다

바람에 날려

흰 꽃잎 다 떨어지고

꽃잎 매달린 자리

오늘은 별들이 내려와 매달려 있다

한번 바람 부니까

지난 봄 간 곳 없고

사람이 살다 간 자리

아슬하게 벼랑만 남아 있다

붉은 열매 떨어진 자리

오늘은 눈이 흰 꽃잎 오려붙인다 *

 

* 아직도 사람은 순수하다 
죽을 때까지 사람은
땅을 제것인 것처럼 사고 팔지만
하늘을 사들이거나 팔려고 내놓지 않는다
하늘을 손대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은 아직 순수하다
하늘에 깔려있는 별들마저
사람들이 뒷거래 하지 않는 걸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순수하다 *

 

* 무영탑  

불국사 대웅전 뜨락에 서서

천년 세월

풍우에 깎인 돌과 함께

탑을 떠나지 않는

백제의 석공 아사달이여

돌에 새겨진 연꽃은 지지 않고

사시사철 피어있다

연못에 몸을 던진 아사녀의 혼이

지금도 연꽃으로 피어있다

불국사 대웅전 뜨락에 서서

석가여래께서 나직이 설법하시느니

그 말씀 목판 다라니경(陀羅尼經)에 새겨

다음 세상 내세(來世)의 천 년을 건너간다

잠 오지 않는 이국의 밤

서라벌의 달빛은

아사달의 손가락 마디마다 맺혀

아리따운 아사녀의 혼불을 밝히고

돌 하나 하나 마다  눈물인 듯

무영탑은  소리없이 제 그림자마저 지우는구나 * 

 

* 가을 문안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오,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슬픔이
어둠 속에서 굳어져 별이 됩니다
한밤에 떠 있는 우리의 별빛을 거두어
당신의 등잔으로 쓰셔요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만 가혹하게 빛나는 우리의 별빛
당신은 그 별빛을 거느리는 목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종루에 내린 별빛은 종을 이루고
종을 스친 별빛은 푸른 종소리가 됩니다
풀숲에 가만히 내린 별빛은 풀잎이 되고
풀잎의 비애를 다 깨친 별빛은 풀꽃이 됩니다
핍박받은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하늘에 맺힌 별빛이 될 때까지
종소리여 풀꽃이여.....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

 

* 사모곡

이제 나의 별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지상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나의 별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

어.머.니 *

 

* 눈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리는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 우야꼬 인자 우짜꼬

노는 날도 없이 

한평생 쎄가 빠지게 철공일 했던 생야 

꼴랑 수당 몇 푼 더 받을끼라고 

새벽별 뜬 저 산 만대이 전주고

날마다 일 나갔던 생야 

우야꼬 인자 우짜고 

이리 훵하니 못 오는 길 혼자 가뿌렸으니

아부지 어무이가 있는 나라

초또 비알 한 번 떠나몬

인자 못 옵니데이

잘 가시소, 생야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웬일인지 별 하나 안 보인다 아입니꺼

남은 별만 저거들끼리

눈물 흘린다 아입니꺼

우야꼬 인자 우짜꼬

*동요가사 차용

 

* 봄 꿈을 꾸며  
만약에 말이지요, 저의 임종 때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열 두 달 가운데
어느 달이 가장 마음에 들더냐
하느님께서 하문하신다면요
저는 이월이요
라고 서슴지않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눈바람이 매운 이월이 끝나면
바로 언덕너머 꽃 피는 봄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
네, 이월이요, 한 밤 두 밤 손꼽아 기다리던
꽃 피는 봄이 코앞에 와 있기 때문이지요
살구꽃 ,산수유,복사꽃잎 눈부시게
눈처럼 날리는 봄날이
언덕너머 있기 때문이지요.
한평생 살아 온 세상의 봄꿈이 언덕너머 있어
기다리는 동안
세상은 행복했었노라고요 *
* 김종해시집[봄꿈을 꾸며]-문학세계사

 

* 김종해(金鍾海)시인

-1941년 부산 출생

-1963년 [경향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1983년 현대문학상, 1995년 한국시협상, 2002년 공초문학상 등 수상

-시집 [항해일지][봄꿈을 꾸며][누구에게나 봄날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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