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효림♡ 2009. 4. 8. 08:13

* 봄은 - 신동엽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ㅡ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ㅡ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 신경림[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글로세움

 

* 휴전선(休戰線) -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

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

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야기뿐인가.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번 겪으라는가 아무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2]-마음산책

 

* 자하문 밖 - 김관식  

  나는 아직도 청청이 어우러진 수풀이나 바라보며 병을 다스리고 살 수밖엔 없다. 혼란한 꾀꼴새의 매끄러운 울음 끝에 구슬 목청을 메아리가 도로 받아 얼른 또 넘겨 빽빽한 가지 틈을 요리조리 휘돌아 구을러 흐르듯 살아가면 앞길은 열리기로 마련이다.
 
   사람이 사는 길은 물이 흘러가는 길.
   산마을 어느 집 물항아리에 나는 물이 되어 고여 있다가 바람에 출렁거려 한 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처럼 여기에 흘러왔을 따름인 것이다.
 
   여름 햇살이 열음처럼 여물어 쏟아지는 과일밭.
   새카맣게 그을은 구리쇠빛 팔다리로 땀을 적시고 일을 하다가 가을철로 접어들면 몸뚱아리에 살오른 실과들의 내음새를 풍기며 한번쯤 흐물어지게 익을 수는 없는가.
 
   해질 무렵의 석양 하늘 언저리 수심가같이 스러운 노을이 떨어지고 밤그늘이 덮이면 예저기 하나둘씩 초록별이 솟아나 새초롬한 눈초리로 은근히 속샐기며 어리석음을 흔들어 일깨워준다.
 
   수줍은 달빛일래 조촐하게 물들어 영롱히 자라나는 한그루 향나무의 슬기로움을 그 곁에 깃들여서 배우는 것은 여간 크낙한 기쁨이 아니라서 스스로의 목숨을 곱게 불살라 밝음을 얘기하는 난낱 촛불이 열두폭 병풍 두른 조강한 신혼초야 화촉동방에 시집 온 큰애기를 조용히 맞이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며 구름 속에 파묻혀 기러기 한백년을 이냥 살으리로다. *
 

* 신경림[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글로세움

 

*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2]-마음산책

 

* 소곡(小曲) - 박목월

불이 켜질 무렵

잠드는 바람같은

목마름

 

진실로

겨울의 해질 무렵

잠드는 바람 같은

적막한 명목 (暝目) *

* 신달자시인[시가 있는 아침]-문학의문학

 

* 자귀나무*의 매력 - 박주일

사월에 

밤에 

홍수술 달고 내 곁에 

서로가 서로의 

그늘 안에 있었구나. 

지금 내 

너의 하얀 살 속으로 따라가다가 

마침내, 

두근거리는 가슴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추억의 팔만대장경**에 잠시 기댔다가 

오는 길인데 

너는 어쩌자고 밤마닥 

꼭 밤에 

네 잎을 접는 그 아픔 가까이 

오늘 밤도 내 

천리 길을 가네. *

* 밤에 잎을 접는 나무. 꽃말-가슴 두근거림.

** 팔만대장경도 자귀나무로 만들어졌음.

* 라드니 타이슨-홍은택공역[영어로 읽는 한국의 좋은 시]-문학사상사

 

* 엽편 이제(葉篇 二題) - 김춘수  

 

미수(眉壽) 지난 이무기는 죽어서 

용이 되어 하늘로 가고 

놋쇠 항아리 하나 

물먹고 가라앉았다. 지금 

개밥 순채 물달개비 따위 

서로 삿대질도 하고 정도 나누는 

그 위 아래, 

산 

그가 그려준 산은

짙은 옻빛이다.

그런 산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볼 때마다 지긋이 내 어깨를 누른다.

없는 것의 무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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