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 춘신(春身)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 메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
* 생명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여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을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 너에게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아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
* 매화나무
겨우 소한(小寒)을 넘어선 뜰에 내려
매화나무 가지 아래 서서 보니
치운 공중에 가만히 뻗고 있는
그 가녀린 가지마다에
어느새 어린 꽃봉들이 수없이 생겨 있다
밤이며는 내가 새벽마다 일어 앉아
싸늘한 책장을 손끝으로 넘기며 느끼는
엊저녁 그 모색(暮色) 속 한천(寒天) 아래 까무러치듯
외로이도 얼어붙던 먼 山山들!
그러면서도 무엔지
아련하고도 따뜻이 마음 뜸 돌던 느낌을
이 가지들도 느껴 왔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표연히 집을 나서
어디고 먼 바닷가에나 가서
그 바다의 양양(洋洋)함을 바라보고
홀로의 생각에 젖었다 오곺음!
이런 수럿한 심정도 어쩌면
저 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적에
내가 느껴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매운 바람결이 몰려 닿을 적마다
어린 꽃봉들을 머금은 가녀린 가지는
외로움에 스스로 다쳐서는 안 된다! 고
살래살래 타일르듯 흔들거린다 *
* 동백(冬栢)꽃
그대 위하여
목 놓아 울던 청춘이 이 꽃 되어
천년 푸른 하늘 아래
소리 없이 피었나니
그날
한장 종이로 꾸겨진 나의 젊은 죽음은
젊음으로 말미암은
마땅히 받을 벌이었기에
원통함이 설령 하늘만 하기로
그대 위하여선
다시도 다시도 아까울 리 없는
아아 나의 청춘의 피꽃! *
*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
* 입추
이제 가을은 머언 콩밭짬에 오다
콩밭 너머 하늘이 한걸음 물러 푸르르고
푸른 콩잎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일다
쨍이 한 마리 바람에 흘러흘러 지붕 너머로 가고
땅에 그림자 모두 다소곤히 근심에 어리이다
밤이면 슬기론 제비의 하마 치울 꿈자리 내 맘에 스미고
내 마음 이미 모든 것을 잃을 예비 되었노니
가을은 이제 머언 콩밭짬에 오다 *
* 저녁놀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밤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 별
어느날 거리엘 나갔다 비를 만나 지나치던 한 처마 아래 들어섰으려니
내 곁에도 역시 나와 한 가지로 멀구러미 하늘을 쳐다보고 비를 긋고 섰는
사나이가 있어,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문득 그 별이 생각났다
밤마다 뜨락에 내려 우러러 보노라면 만천의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의 별 가차이 나도 모를, 항상 그늘 많은 별 하나-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나누어져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지낼 수 밖에 없는
먼 먼 그 별, 그리고 나의 별!
* 水仙花
몇 떨기 수선화ㅡ-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宿醉)의 아침 거츠른 내 심사(心思)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寒風)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움쿠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鬱鬱)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地核)의 깊은 동통(疼痛)을 가만이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
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우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人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야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ㅎ고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였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이 왼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敬虔)한 경건한 손일네라
*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 해바라기들 새에 서서
나도 해바라기가 되려오.
황금사자(黃金獅子) 나룻
오만(傲慢)한 왕후(王候)의 몸매로
진종일 찍소리 없이
삼복(三伏)의 염천(炎天)을 노리고 서서
눈부시어 요요히 호접(蝴蝶)도 못오는 백주(白書)!
한 점 회의(懷疑)도 감상(感傷)도 용납치 않는
그 불령(不逞)스런 의지(意志)의 바다의 한 분신(分身)이 되려오.
해바라기의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의 밭으로 가서
해바라기가 되어 섰으려오.
* 梔子꽃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 가는 고향의 슬프디 슬픈 해안통(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천막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
* 우편국에서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
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라빛 갯바람이 할일 없이 지나가고
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
* 유치환시인
-1908~1967 경남 충무 출생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 등단,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상을 수상
-시집 [청마시초[생명의 서][울릉도][미루나무와 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