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정호승 시 모음

효림♡ 2009. 4. 7. 20:05

* 문득 - 정호승  

문득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상산포 앞바다는 잘 있는지

그때처럼

수평선 위로

당신하고

걷고 싶었어요 *

* 정호승시집[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 사랑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달은 지구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나는 너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

 

* 동박새  

죽어서도 기뻐해야 할 일 찾아다니다가
죽어서도 사랑해야 할 일 찾아다니다가
어느 날 네 가슴에 핀 동백꽃을 보고
평생 동안 날아가 나는 울었다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 꽃 지는 저녁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

* 정호승시집[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귀뚜라미에게 받은 짧은 편지

울지 마
엄마 돌아가신 지
언제인데
너처럼 많이 우는 애는
처음 봤다
해마다 가을날
밤이 깊으면
갈댓잎 사이로 허옇게
보름달 뜨면
내가 대신 이렇게
울고 있잖아 *

 

* 나의 첫 키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 봐
해가 떠도 눈 한 번 뜰 수가 없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 봐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 햇살에게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 구두 닦는 소년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 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하루 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짖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닦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닦는다
이 세상 별빛 한 손에 모아
어머니 아침마다 거울을 닦듯
구두 닦는 사람들 목숨 닦는다
묵숨 위에 내려앉은 먼지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메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별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

 

* 소년 부처  

보슬비 내릴 때

빗방울 위에

나팔꽃 필 때

꽃이파리 위에

함박눈 내릴 때

눈송이 위에

어둠이 깊어갈 때

초승달 위에

소년 부처님

고요히 앉아

웃으시다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 소년 부처  

경주박물관 앞마당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햇살에 눈부시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 부처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 북한강에서
너를 보내고 나니 눈물 난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날이 올 것만 같다
만나야 할 때에 서로 헤어지고
사랑해야 할 때에 서로 죽여버린
너를 보내고 나니 꽃이 진다
사는 날까지 살아보겠다고

기다리는 날까지 기다려보겠다고
돌아갈 수 없는 저녁 강가에 서서
너를 보내고 나니 해가 진다
두 번 다시 만날 날이 없을 것 같은
강 건너 붉은 새가 말없이 사라진다
 *

 

* 겨울강에서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강 강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 강물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랑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 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였다 절망이였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였다 희망이였다
 

 

* 등신불  

강물도 없이 강이 흐르네

하늘도 없이 눈이 내리네

사랑도 없이 나는 살았네


모래를 삶아 밥을 해먹고

모래를 짜서 물을 마셨네


잘 가게

뒤돌아보지 말게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네


눈이 오는 날

가끔 들르게


바람도 무덤이 없고

꽃들도 무덤이 없네 

 

* 길  

나 돌아갈 수 없어라

너에게로


그리운 사람들의

별빛이 되어


아리랑을 부르는

저녁별 되어


내 굳이 너를 마지막 본 날을

잊어버리자고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울어보아도


하늘에는 비 내리고

별들도 길을 잃어


나 돌아갈 수 없어라

너에게로

 

* 수덕여관  

일생에 한번쯤

수덕사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고

평생 오지 않았던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붉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비록 이튿날 아침 깨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생에 하룻밤쯤

수덕여관 산당화에 기대어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맺은 열매에

다시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평생 오지 않는 잠이 있다면

수덕여관 샘물을 한 바가지 들이켜보아라

물 위에 코끼리를 타고

모든 쓸쓸한 사랑이 지나가버린다 *

* 정호승시집[밥값]-창비

 

결빙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 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 첫 눈 
너에게는 우연이나
나에게는 숙명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는 일이
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나는 네가 흘렸던
분노의 눈물을 잊지 못하고
너는 가장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길 떠나는 나를 내려다본다
또다시 용서해야할 일과
증오해야할 일을 위하여
오늘도 기도하는 새의
손등 위에 내린 너 *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 군밤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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