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문태준 시 모음

효림♡ 2009. 5. 13. 08:06

*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 문태준   

고샅을 돌아 부푼 달 아래 걷는데
거뭇거뭇한 논배미에서
한 뭉테기로 와글
귀를 촘촘하게 열었더니
논개구리들이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이 봄밤에 방랑악사들이
대고를 두드리는데
참 멋진 춘화 한장입니다
온 우주가 잔뜩 바람난 꽃입니다

 

* 뻘 같은 그리움  

그립다는 것은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 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들어 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 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 꽃 진 자리에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 老母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 준다 *

* 문태준시집[가재미]-문학과지성사,2005

 

* 白露 
뒤늦게 애가 들어선 사십대 여자처럼
늙은네 발톱 같은 껍질을 가르고 붉은 석류가 터져나오고 있었는데
바람도 으스름달도 모르게
먼데서 온 마수걸이 손님처럼
이슬 하나까지 얹혀
그래도 살아남은 꽃시절이 있었다

* 망나니가 건넨 말
초승달을 저만치 걸어두고
무덤에서 반 썩은 열 되 남짓 내 송장이
걸어가는 사람의 발을 이 밤에 잡아 채거든 오랜 습관으로 알 것
삼신밥을 올리는 점쟁이로 알 것
산 사람이 귀양간들 탱자나무 안
세월이야 봉창 뚫린 집에 한 사나흘 묵었다 가지
마음은 허허벌판에 쏟아지는 우레 같은 것
주리틀수록 외로워지는 것
거미줄을 걷고 빈집의 문간 드나들며 방칸 수나 이따금 세어볼 것

* 봄비 맞는 두릅나무
산에는 고사리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러다 봄 가면 뼈마디가 쑤시겠다


* 수런거리는 뒤란
山竹 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뒷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 날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갈 수 없듯이

* 나무 다리 위에서
풀섶에는 둥근 둥지를 지어놓은 들쥐의 집이 있고
나무 다리 아래에는 수초와 물고기의 집인 여울이 있다

아아 집들은 뭉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높고 쓸쓸하고 흐른다

나무 다리 위에서 나는 세월을 번역할 수 없고
흘러간 세월을 얻을 수도 없다

입동 지나고 차가운 물고기들은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
내 눈에서 눈으로 여울이 흐르듯이
한 근심에서 흘러오는 근심으로 힘겹게 재를 넘어서고 있다


*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 앵두나무와 붉은 벌레들
앵두나무 가지 위로는 한쪽이 트인 달이 떴다
앵두나무 가지에 사는 붉은 벌레들은 오늘 밤에도 만났다
누구일까
늙은 앵두나무에 이렇게
다투는 허공을 담을 줄 안 이는 

 

* 봉숭아 - 다현(茶顯)에게 

봉숭아라는 이름

조그만 복숭아뼈 같지

오늘 낮에는

여섯 살 딸이

화단의 봉숭아꽃을 보고 있다

홍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쪼그려 앉은 두 발목이 붉다

발목에서부터 붉은 물이 번지고 있다

한 종이가 사각사각 젖고 있다

여섯 살은 아무래도 무른 몸

무릎이 젖고 작은 어깨가 젖는데

삐에에 울지도 않는다

* 역전 이발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이 살고 있고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 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 호두나무와의 사랑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철 지난 매미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불에 구운 흙처럼 내 마음이 뒤틀리는 걸 보니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겠다


* 묵정밭에서
찾아가고 싶다 밭 가운데 무너지는 무덤, 마른 수풀 비석 세우고 이승으로 내려와도 더운밥 한술 뜨지 못하는 당신을 만나고 싶다 산에서 내려온 질경이 아카시아 들쥐에게 온몸 내주는 그대의 이력을 얘기해주오 볕바른 산중턱, 이속의 억수비에도 물길 걱정 없는 그곳 버려두었으니 당신의 한평 누운 자리는 허물어지는 목, 들일과 당신이 부린 집짐승과 농사 일지를 기억해주오 서러울 것 없다 바람 얌전하고 亡者여, 이 세상 저물녘에 둥근 집으로 지고 들어간 것은 무엇입니까 
 

 

* 빈집 1
흙더버기 빗길 떠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 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발들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리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집니다 하지만 오랜 후에 당신이 돌아와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들을 보신다면, 그 안에 고여 곰팡이

슨 내 기다림을 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고 험한 마당 후련하게 쓸어줄 일입니다 *


* 빈집 2
지붕 위로 기어오르는 넝쿨을 심고 녹이 슨 호미는 닦아서 걸어두겠습니다 육십촉 알전구일랑 바꾸어 끼우고 부질없을망정 불을 기다리렵니다 흙손으로 무너진 곳 때워보겠습니다 고리 빠진 문도 고쳐보겠습니다
옹이 같았던 사랑은 날 좋은 대패로 밀고 문지방에 백반을 놓아 뱀 넘나들지 않게 또 깨끗한 달력 그 방 가득 걸어도 좋겠습니다


* 태화리 도둑골
딱따구리 한마리가 숲에서
목구멍을 치는 소리
먹는 입이 저처럼
활엽수를 쪼는 딱따구리만큼 맑아질 수 있을까
하도 맑아
상처를 잊은 듯
나무의 존재도 오롯하게
허공에 부풀어

 

* 개복숭아나무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 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럼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 맷돌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운 농투사니 아재의 복숭아뼈 같다  

동구에 앉아 주름으로 칭칭 몸을 둘러세운 늙은 팽나무 같다 

죽은 돌들끼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같다  

가을 털갈이를 하는 우리집 새끼 밴 염소 같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녹두꽃 같은 눈물을 고이게 할 것 같다  

그런 맷돌을, 더는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외할머니가 돌리고 있다  

 

* 장대비 멎은 소읍  

땅이 소란스러운 때를 보냈으니 누에가 갉아먹다 버린 뽕잎같다 

장대비가 다녀가셨다  

복사꽃처럼 소란한 놈도 걔중에는 있었고  

귓불이 도톰하고 거위 소리처럼 굵은 울대를 가진 놈도 다녀가셨다 

비 내린 땅은 돌꽃마냥 꼿꼿이 파인 얼굴이다  

팔랑팔랑 하얀 나비 새로이 나는 것으로 장대비 멎은 줄 아는 것이지만  

집을 주섬주섬 나오는 촌로들은 늙고 초췌하다   

 

* 뜨락 위 한 켤레 신발  

어두워지는 뜨락 위 한 켤레 신발을 바라본다

언젠가 누이가 해종일 뒤뜰 그늘에 말리던 고사리 같다

굵은 모가지의 뜰!

다 쓴 여인네의 분첩

긴 세월 몸을 담아오느라 닳아진

한 켤레 신발이 있다

아, 길이 끝난 곳에서도 적멸은 없다  

 

* 팽나무 식구  

작은 언덕에 사방으로 열린집이 있었다

낮에 흩어졌던 새들이 큰 팽나무에 날아와 앉았다

한놈 한놈 한곳을 향해 웅크려 있다

일제히 응시하는 것들은 구슬프고 무섭다

가난한 애비를 둔 식구들처럼

무리에 볼이 튼 어린 새도 있었다

어두워지자 팽나무가 제 식구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 흰자두꽃  

손아귀에 힘이 차서 그 기운을 하얀꽃으로 풀어놓은 자두나무 아래

못을 벗어나 서늘한 못을 되돌아보는 이름모를 새의 가는 목처럼

몸을 벗어나 관으로 들어가는 몸을 들여다보는 식은 영혼처럼

자두나무의 하얀 자두꽃을 처량하게 바라보는 그 서글픈 나무 아래

곧 가고 없어 머무르는 것조차 없는 이 무정한 한낮에

나는 이 생애에서 딱 하번 굵은 손벼마디 같은 가족과

나의 손톱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 하늘궁전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더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 있다
눈썹만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먹던 늦은 저녁밥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 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 따오기  

논배미에서 산그림자를 딛고 서서

꿈쩍도 않는

늙은 따오기

늙은 따오기의 몸에 깊은 생각이 머물다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어느날 내가 빈 못을 오도카니 바라보았듯이

쓸쓸함이 머물다 가는 모습은 저런 것일까요

산그림자가 서서히 따오기의 발목을 흥건하게 적시는 저녁이었습니다 

 

*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눈에서 눈으로 산그림자처럼 옮겨가는 슬픔들

오지항아리처럼 우는 새는 더 큰 항아리인 강이 가둡니다

당신과 나 사이
이곳의 어둠과 저 건너 마을의 어둠 사이에
큰 둥근 바퀴 같은 강이 흐릅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소가 웁니다
찬 강에 는개가 축축하게 젖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낮 동안 새끼를 이별했거나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거나
목이 쉬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우는 소의 희고 둥근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 산수유나무의 농사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 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세상 한 곳 한 곳 하나 하나가 저녁에 대해 말하다

까마귀는 하늘이 길을 꾹꾹 눌러 대밭에 앉는다고 운다

노란 감꽃이 핀 감잎은 등이 무거워졌다고 말한다

내가 난 들고양이는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간다

나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찬물에 발을 씻으며 검게 입을 다물었다  

 

* 산비 소리에  

누가 푸른 똥을 누시나

떨어져 번지는, 이끼처럼 번지는, 더 번져 몽글몽

글 맺히는 똥

맺혀도 몰랑몰랑한 똥

 

푸른 벌레가 산자두잎 뒤 잎사귀 처마로 들어가 동

글동글한 똥을 피한다

 

목주름 펴 처마 바깥을 갸웃거리다 잗다랗고 말랑말

랑란 푸른 똥 누고 자울자울 존다

 

잎사귀 처마를 득득 긁는 산비 소리에

윗니 아랫니 돋아 간질간질한 산비 소리에       

 

* 문태준시인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處署]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2006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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