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마스테 - 복효근
나마스테라는 말이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경배합니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코끝이 찡하고 나를 울렸다 내 안의 신이 나를 깜짝 깨웠기 때문이다 3억3천만의 신이여 그 신들이 부르는 또 3억 3천만의 신이여, 그 신이 부르는 또 다른 3억 3천만의 신이여 모든 그대여 신이여 나마스테!
* 섬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 겨울 궁남지
* 콩나물에 대한 예의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 꿈에 나비를 보다
꿈에 나비를 보았다
보통 나비보다 열 배는 더 크고 화려한 색채로 물들여진 나비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군가 오색 한지에 나비를 예찬하는시를 적고 한지를 날개 모양으로 오려서 나비의 날개에 접착제로 붙여놓았다. 나비는 제가 가진 색깔보다 화려하고 제가 가진 날개보다 훨씬 큰 날개로 있는 힘을 다 하여 날고 있었다 내가 다가갔을 때엔 이미 기력을 다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꿈에 장주를 보았다
* 매화가 필 무렵
매화가 핀다
내 첫사랑이 그러했지
온밤내 누군가
내 몸 가득 바늘을 박아넣고
문신을 뜨는 듯
꽃문신을 뜨는 듯
아직은
눈바람 속
여린 실핏줄마다
핏멍울이 맺히던 것을
하염없는
열꽃만 피던 것을 ……
십수삼년 곰삭은 그리움 앞세우고
첫사랑이듯
첫사랑이듯 오늘은
매화가 핀다
* 동정녀 은행나무
우리 집 은행나무
제 가지 휘어지도록 은행알 맺었다
은행나무 수크루 하나 다녀간 적 없는데
나는 안다
그녀의 수태비밀까지는 몰라도
눕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없이 기도하던 그 자세를
또랑또랑 별의 눈망울을 닮은 은행은
그래서 또한 큰 염주알 같기도 하다는 것을
* 연민
햇고사리 그 야들야들한 맛
못 잊어
6월 두 벌 고사리 따러 갔다가
꺾여졌던 자리 곁에서 종주먹 쥐고 솟는 애고사리
차마 따지 못했다
* 합일
그 희고 눈부신 소식을 그냥 받을 수 없어서
처음 오는 눈을 제 체온으로 녹여
몸을 씻고
더운 몸을 식혀
눈의 몸에 온도를 맞춘 다음에야
바위는
온 몸으로 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 배 과수원에서
아니, 저 발칙한
온 천지 배꽃
배꼽
다 드러내놓고
암술수술 무성한
그것도 다 드러내놓고
흘레붙는
그 고요로운 소리에 달빛이 달다
남자인 내가 다 회임하겠다
쳐다만 봐도 배 불러오겠다
* 집중
매미 한 마리가
한낮을 온통 점령해버렸다
그 울음 한번 깊다
서늘하다
아파트 한 채가 거기에 잠겨 섬처럼 존다
지금 매미는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
해야 하는 것도 그것밖에 없다
곡비처럼 운다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매미의 울음을 그리 깊게 하였겠구나
매미는 하마 그리운 것의 그 끝에 닿았겠다
폭포를 뚫는 소리꾼의 독공처럼
하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도 좋겠다
저 울음 가락에 장단 넣으려는 듯
하늘엔
소리북 같은 낮달이 하나
* 자벌레
오체투지, 일보일배(一步一拜)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일러니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 소리물고기
내소사 목어 한 마리 내 혼자 뜯어도 석 달 열흘 우리 식구 다 뜯어도 한 달은 뜯겠다 그런데 벌써 누가 내장을
죄다 빼먹었는지 텅 빈 그 놈의 뱃속을 스님 한 분 들어가 두들기는데...
소리가 하, 그 소리가 허공중에 헤엄쳐 나가서 한 마리 한 마리 수천 마리 물고기가 되더니
하늘의 새들도 그 물고기 한 마리씩 물고 가고 칠산바다 조기떼도 한 마리씩
온 산의 나무들도 한 마리씩 구천의 별들도 그 물고기 한 마리씩 물고 가는데...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목어는 하, 그 목어는 여의주 입에 문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능가산 숲을 바람그네 타고 노는데...
숲 저쪽 만삭의 달 하나 뜬다 *
* 복효근시집[새에 대한 반성문]-시와시학사
* 탱자
가시로 몸을 두른 채
귤이나 오렌지를 꿈꾼 적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밖을 향해 겨눈 칼만큼이나
늘 칼끝은 또 스스로를 향해있어서
제 가시에 찔리고 할퀸 상처투성이다
탱자를 익혀온 것은
자해 아니면 고행의 시간이어서
썩어문드러질 살보다는
사리 같은 씨알뿐
탱자는,
그 향기는 제 상처로 말 걸어온다
* 내가 정말 장미를 사랑한다면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타오르는
그 집에 사는 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낙엽이 지고 덩굴 속에 쇠창살이 드러나자
그가 사랑한 것은 꽃이 아니라 가시였구나
그 집 주인은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려다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 조팝꽃
조팝꽃이라고 했단다
산허리 내려찍으며 칡뿌리 캘 때
어질어질 어질머리
꽃이 밥으로 보여 조ㅎ(粟)밥꽃이라고 했다
아이야,
그 서러운 조어법, 조팝꽃 발음할 때는
좀 아릿한 표정이래도 지어다오
저 심심산천 무덤가에 고봉밥
헛배만 불러오는 조팝꽃 고봉밥
고봉밥 몇 그릇 *
* 복효근시집[새에 대한 반성문]-시와시학사
* 안개꽃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
* 꽃본죄
난분분 십리 화개
꽃너울 좀 봐
어휴 어휴
열 예닐곱 몽정 빛깔로
숨이 차는데
오늘은
섬진강 어느 처녀랑 눈이 맞아서
때마침 차오르는 산비알 녹차밭에
부여안고 넘어진대도
아무 일 없을 듯
아무 일도 없을 듯
니캉 내캉
꽃 본 죄밖에
꽃 된 죄밖에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꽃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뱃속까지를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 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 받쳐주네 *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 쟁반탑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 여시아문(如是我聞)
인도 뭄바이 새벽 세 시
가로수 잎사귀가 낯설고 신기로워
늘어진 가지를 붙잡고 가만 만져보는데
그가 말했다
인도에선 밤에 나무를 손대지 않는다고
왜냐고 내가 묻자 영어에 서툰 나를 위하여
영국식 영어로 천천히 말했다
나무가 잠을 자잖아요
* 여울이라는 말
여울이란 말 예쁘지 않나요? 내 애인의 이름이 여울이었으면 좋겠어요.
세월이 여울져간다는 말 휘늘어진 버들가지처럼 느럭느럭 여유 있어 보이지 않나요?
강여울 여울여울 기복도 결도 보여주지 않는 그 한가로운 표정이 넉넉해 보이지 않나요?
그러나 물살이 거세게 흐르는 곳이라는 강퍅한 뜻을 가진 말이란 것도 아시나요?
내 애인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단박에 그 빠른 물길에 휩쓸어 가버리면서도 그 표정은 여울이란 말처럼이나 끄떡없어서
내가 여울에 빠져 허우적댄다 해도 남들이 듣기에 춤처럼은 느껴지지 않을래나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안노라시는* 그 능갈맞은, 그래서 천만번은 더 빠져나 보고 싶은 여울 여울이란 말 참 예쁘지 않나요? *
* 소월의 [개여울]에서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 배롱꽃 지는 뜻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