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마스테 - 복효근
나마스테라는 말이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경배합니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코끝이 찡하고 나를 울렸다 내 안의 신이 나를 깜짝 깨웠기 때문이다 3억3천만의 신이여 그 신들이 부르는 또 3억 3천만의 신이여, 그 신이 부르는 또 다른 3억 3천만의 신이여 모든 그대여 신이여 나마스테!
* 섬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 겨울 궁남지 * 콩나물에 대한 예의 * 꿈에 나비를 보다 꿈에 나비를 보았다 * 매화가 필 무렵 내 첫사랑이 그러했지 온밤내 누군가 내 몸 가득 바늘을 박아넣고 문신을 뜨는 듯 꽃문신을 뜨는 듯 아직은 눈바람 속 여린 실핏줄마다 핏멍울이 맺히던 것을 하염없는 열꽃만 피던 것을 …… 십수삼년 곰삭은 그리움 앞세우고 첫사랑이듯 첫사랑이듯 오늘은 매화가 핀다 * 동정녀 은행나무 우리 집 은행나무 제 가지 휘어지도록 은행알 맺었다 은행나무 수크루 하나 다녀간 적 없는데 나는 안다 그녀의 수태비밀까지는 몰라도 눕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없이 기도하던 그 자세를 또랑또랑 별의 눈망울을 닮은 은행은 그래서 또한 큰 염주알 같기도 하다는 것을 * 연민 햇고사리 그 야들야들한 맛 못 잊어 6월 두 벌 고사리 따러 갔다가 꺾여졌던 자리 곁에서 종주먹 쥐고 솟는 애고사리 차마 따지 못했다 * 합일 그 희고 눈부신 소식을 그냥 받을 수 없어서 처음 오는 눈을 제 체온으로 녹여 몸을 씻고 더운 몸을 식혀 눈의 몸에 온도를 맞춘 다음에야 바위는 온 몸으로 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 배 과수원에서 배꼽 다 드러내놓고 그것도 다 드러내놓고 그 고요로운 소리에 달빛이 달다 쳐다만 봐도 배 불러오겠다 * 집중 한낮을 온통 점령해버렸다 그 울음 한번 깊다 서늘하다 아파트 한 채가 거기에 잠겨 섬처럼 존다 지금 매미는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 해야 하는 것도 그것밖에 없다 곡비처럼 운다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매미의 울음을 그리 깊게 하였겠구나 매미는 하마 그리운 것의 그 끝에 닿았겠다 폭포를 뚫는 소리꾼의 독공처럼 하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도 좋겠다 저 울음 가락에 장단 넣으려는 듯 하늘엔 소리북 같은 낮달이 하나 * 자벌레 오체투지, 일보일배(一步一拜)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일러니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 소리물고기 내소사 목어 한 마리 내 혼자 뜯어도 석 달 열흘 우리 식구 다 뜯어도 한 달은 뜯겠다 그런데 벌써 누가 내장을 죄다 빼먹었는지 텅 빈 그 놈의 뱃속을 스님 한 분 들어가 두들기는데... 하늘의 새들도 그 물고기 한 마리씩 물고 가고 칠산바다 조기떼도 한 마리씩 온 산의 나무들도 한 마리씩 구천의 별들도 그 물고기 한 마리씩 물고 가는데...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보통 나비보다 열 배는 더 크고 화려한 색채로 물들여진 나비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군가 오색 한지에 나비를 예찬하는시를 적고 한지를 날개 모양으로 오려서 나비의 날개에 접착제로 붙여놓았다. 나비는 제가 가진 색깔보다 화려하고 제가 가진 날개보다 훨씬 큰 날개로 있는 힘을 다 하여 날고 있었다 내가 다가갔을 때엔 이미 기력을 다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꿈에 장주를 보았다
매화가 핀다
아니, 저 발칙한
온 천지 배꽃
암술수술 무성한
흘레붙는
남자인 내가 다 회임하겠다
매미 한 마리가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몸으로 읽는 경전
소리가 하, 그 소리가 허공중에 헤엄쳐 나가서 한 마리 한 마리 수천 마리 물고기가 되더니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목어는 하, 그 목어는 여의주 입에 문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능가산 숲을 바람그네 타고 노는데...
숲 저쪽 만삭의 달 하나 뜬다 *
* 복효근시집[새에 대한 반성문]-시와시학사
* 탱자
가시로 몸을 두른 채
귤이나 오렌지를 꿈꾼 적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밖을 향해 겨눈 칼만큼이나
늘 칼끝은 또 스스로를 향해있어서
제 가시에 찔리고 할퀸 상처투성이다
탱자를 익혀온 것은
자해 아니면 고행의 시간이어서
썩어문드러질 살보다는
사리 같은 씨알뿐
탱자는,
그 향기는 제 상처로 말 걸어온다
* 내가 정말 장미를 사랑한다면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타오르는
그 집에 사는 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낙엽이 지고 덩굴 속에 쇠창살이 드러나자
그가 사랑한 것은 꽃이 아니라 가시였구나
그 집 주인은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려다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 조팝꽃
조팝꽃이라고 했단다
산허리 내려찍으며 칡뿌리 캘 때
어질어질 어질머리
꽃이 밥으로 보여 조ㅎ(粟)밥꽃이라고 했다
아이야,
그 서러운 조어법, 조팝꽃 발음할 때는
좀 아릿한 표정이래도 지어다오
저 심심산천 무덤가에 고봉밥
헛배만 불러오는 조팝꽃 고봉밥
고봉밥 몇 그릇 *
* 복효근시집[새에 대한 반성문]-시와시학사
* 안개꽃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
* 꽃본죄
난분분 십리 화개
꽃너울 좀 봐
어휴 어휴
열 예닐곱 몽정 빛깔로
숨이 차는데
오늘은
섬진강 어느 처녀랑 눈이 맞아서
때마침 차오르는 산비알 녹차밭에
부여안고 넘어진대도
아무 일 없을 듯
아무 일도 없을 듯
니캉 내캉
꽃 본 죄밖에
꽃 된 죄밖에
* 배롱꽃 지는 뜻은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꽃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뱃속까지를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 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 받쳐주네 *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 쟁반탑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 여시아문(如是我聞)
인도 뭄바이 새벽 세 시
가로수 잎사귀가 낯설고 신기로워
늘어진 가지를 붙잡고 가만 만져보는데
그가 말했다
인도에선 밤에 나무를 손대지 않는다고
왜냐고 내가 묻자 영어에 서툰 나를 위하여
영국식 영어로 천천히 말했다
나무가 잠을 자잖아요
* 여울이라는 말
여울이란 말 예쁘지 않나요? 내 애인의 이름이 여울이었으면 좋겠어요.
세월이 여울져간다는 말 휘늘어진 버들가지처럼 느럭느럭 여유 있어 보이지 않나요?
강여울 여울여울 기복도 결도 보여주지 않는 그 한가로운 표정이 넉넉해 보이지 않나요?
그러나 물살이 거세게 흐르는 곳이라는 강퍅한 뜻을 가진 말이란 것도 아시나요?
내 애인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단박에 그 빠른 물길에 휩쓸어 가버리면서도 그 표정은 여울이란 말처럼이나 끄떡없어서
내가 여울에 빠져 허우적댄다 해도 남들이 듣기에 춤처럼은 느껴지지 않을래나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안노라시는* 그 능갈맞은, 그래서 천만번은 더 빠져나 보고 싶은 여울 여울이란 말 참 예쁘지 않나요? *
* 소월의 [개여울]에서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