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복효근 시 모음

효림♡ 2009. 6. 1. 07:52

* 나마스테 - 복효근   

나마스테라는 말이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경배합니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코끝이 찡하고 나를 울렸다 내 안의 신이 나를 깜짝 깨웠기 때문이다 3억3천만의 신이여 그 신들이 부르는 또 3억 3천만의 신이여, 그 신이 부르는 또 다른 3억 3천만의 신이여 모든 그대여 신이여 나마스테!

 

* 섬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 겨울 궁남지

저 수 천 평 연밭에 연꽃은 자취도 없고
허리가 휘어지거나 무릎이 꺾인 꽃대궁
마른 꽃대궁이 마이크 같다
한 바탕 유세를 부린다
나도 한 때 꽃 피운 적 있노라고
홍련 백련 꽃이었던 적 있었노라고
이제는 구멍 숭숭 벌집 모양
그야말로 벌집이 되어버린 자궁만이
자랑처럼 남아있다
그래, 자궁이지 궁이고 말고
구멍마다 칸칸이 연의 씨앗이 담겨 있어
씨앗 하나에 우주가 담겨 있다면 믿겠나
저 씨앗을 연밥이라 부르느니
모름지기 수 천 평 연밭을 일구고 먹여 살린
밥이라 하는 것이 저 궁에서 나왔느니
진흙땅 젖은 늪 저승이라도 두렵지 않던 홍련
백련 왼갖 잡련 들이
한 빛깔로 저무는 적멸보궁
무슨 고요가 이리도 소란스럽다
겨울 궁남지엔
신경외과 대기실에 모인 어머니들처럼
多産의 무용담 왁자하다
유세 부릴 만하다  

 

* 콩나물에 대한 예의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 꿈에 나비를 보다

꿈에 나비를 보았다 
보통 나비보다 열 배는 더 크고 화려한 색채로 물들여진 나비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군가 오색 한지에 나비를 예찬하는시를 적고
한지를 날개 모양으로 오려서 나비의 날개에 접착제로 붙여놓았다. 나비는 제가 가진 색깔보다 화려하고 제가 가진 날개보다 훨씬 큰 날개로 있는 힘을 다 하여 날고 있었다 내가 다가갔을 때엔 이미 기력을 다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꿈에 장주를 보았다 
 

 

* 매화가 필 무렵   
매화가 핀다

내 첫사랑이 그러했지

온밤내 누군가

내 몸 가득 바늘을 박아넣고

문신을 뜨는 듯

꽃문신을 뜨는 듯

아직은

눈바람 속

여린 실핏줄마다

핏멍울이 맺히던 것을

하염없는

열꽃만 피던 것을 ……                  

십수삼년 곰삭은 그리움 앞세우고

첫사랑이듯

첫사랑이듯 오늘은

매화가 핀다

                  

* 동정녀 은행나무  

우리 집 은행나무

제 가지 휘어지도록 은행알 맺었다

은행나무 수크루 하나 다녀간 적 없는데

나는 안다

그녀의 수태비밀까지는 몰라도

눕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없이 기도하던 그 자세를

또랑또랑 별의 눈망울을 닮은 은행은

그래서 또한 큰 염주알 같기도 하다는 것을

 

* 연민  

햇고사리 그 야들야들한 맛

못 잊어

6월 두 벌 고사리 따러 갔다가

꺾여졌던 자리 곁에서 종주먹 쥐고 솟는 애고사리

차마 따지 못했다

 

* 합일  

그 희고 눈부신 소식을 그냥 받을 수 없어서

처음 오는 눈을 제 체온으로 녹여

몸을 씻고

더운 몸을 식혀

눈의 몸에 온도를 맞춘 다음에야

바위는 

온 몸으로 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 배 과수원에서  
아니, 저 발칙한

온 천지 배꽃

배꼽

다 드러내놓고
암술수술 무성한

그것도 다 드러내놓고
흘레붙는 

그 고요로운 소리에 달빛이 달다
남자인 내가 다 회임하겠다

쳐다만 봐도 배 불러오겠다

 

* 집중 
매미 한 마리가

한낮을 온통 점령해버렸다

그 울음 한번 깊다

서늘하다

아파트 한 채가 거기에 잠겨 섬처럼 존다

지금 매미는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

해야 하는 것도 그것밖에 없다

곡비처럼 운다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매미의 울음을 그리 깊게 하였겠구나

매미는 하마 그리운 것의 그 끝에 닿았겠다

폭포를 뚫는 소리꾼의 독공처럼

하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도 좋겠다

저 울음 가락에 장단 넣으려는 듯

하늘엔

소리북 같은 낮달이 하나

 

* 자벌레

오체투지, 일보일배(一步一拜)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일러니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 소리물고기

내소사 목어 한 마리 내 혼자 뜯어도 석 달 열흘 우리 식구 다 뜯어도 한 달은 뜯겠다 그런데 벌써 누가 내장을

죄다 빼먹었는지 텅 빈 그 놈의 뱃속을 스님 한 분 들어가 두들기는데...


소리가 하, 그 소리가 허공중에 헤엄쳐 나가서 한 마리 한 마리 수천 마리 물고기가 되더니

하늘의 새들도 그 물고기 한 마리씩 물고 가고 칠산바다 조기떼도 한 마리씩

온 산의 나무들도 한 마리씩 구천의 별들도 그 물고기 한 마리씩 물고 가는데...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목어는 하, 그 목어는 여의주 입에 문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능가산 숲을 바람그네 타고 노는데...


숲 저쪽 만삭의 달 하나 뜬다 *

* 복효근시집[새에 대한 반성문]-시와시학사

 

* 탱자

가시로 몸을 두른 채
귤이나 오렌지를 꿈꾼 적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밖을 향해 겨눈 칼만큼이나
늘 칼끝은 또 스스로를 향해있어서
제 가시에 찔리고 할퀸 상처투성이다

탱자를 익혀온 것은
자해 아니면 고행의 시간이어서
썩어문드러질 살보다는
사리 같은 씨알뿐

탱자는,
그 향기는 제 상처로 말 걸어온다

 

* 내가 정말 장미를 사랑한다면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타오르는
그 집에 사는 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낙엽이 지고 덩굴 속에 쇠창살이 드러나자
그가 사랑한 것은 꽃이 아니라 가시였구나
그 집 주인은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려다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 조팝꽃   

조팝꽃이라고 했단다

산허리 내려찍으며 칡뿌리 캘 때

어질어질 어질머리

꽃이 밥으로 보여 조ㅎ(粟)밥꽃이라고 했다

아이야,  

그 서러운 조어법, 조팝꽃 발음할 때는

좀 아릿한 표정이래도 지어다오

저 심심산천 무덤가에 고봉밥

헛배만 불러오는 조팝꽃 고봉밥

고봉밥 몇 그릇 *

* 복효근시집[새에 대한 반성문]-시와시학사

 

* 안개꽃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

 

* 꽃본죄

난분분 십리 화개
꽃너울 좀 봐
어휴 어휴
열 예닐곱 몽정 빛깔로
숨이 차는데
오늘은
섬진강 어느 처녀랑 눈이 맞아서
때마침 차오르는 산비알 녹차밭에
부여안고 넘어진대도
아무 일 없을 듯
아무 일도 없을 듯
니캉 내캉
꽃 본 죄밖에
꽃 된 죄밖에

 

* 배롱꽃 지는 뜻은            

등 같은 연못가 배롱꽃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뱃속까지를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 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 받쳐주네 *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 쟁반탑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 여시아문(如是我聞)
인도 뭄바이 새벽 세 시
가로수 잎사귀가 낯설고 신기로워
늘어진 가지를 붙잡고 가만 만져보는데
그가 말했다
인도에선 밤에 나무를 손대지 않는다고
왜냐고 내가 묻자 영어에 서툰 나를 위하여
영국식 영어로 천천히 말했다
나무가 잠을 자잖아요

* 여울이라는 말

여울이란 말 예쁘지 않나요? 내 애인의 이름이 여울이었으면 좋겠어요.

세월이 여울져간다는 말 휘늘어진 버들가지처럼 느럭느럭 여유 있어 보이지 않나요?

강여울 여울여울 기복도 결도 보여주지 않는 그 한가로운 표정이 넉넉해 보이지 않나요?

그러나 물살이 거세게 흐르는 곳이라는 강퍅한 뜻을 가진 말이란 것도 아시나요?

내 애인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단박에 그 빠른 물길에 휩쓸어 가버리면서도 그 표정은 여울이란 말처럼이나 끄떡없어서

내가 여울에 빠져 허우적댄다 해도 남들이 듣기에 춤처럼은 느껴지지 않을래나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안노라시는* 그 능갈맞은, 그래서 천만번은 더 빠져나 보고 싶은 여울 여울이란 말 참 예쁘지 않나요? *

* 소월의 [개여울]에서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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