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 이정하
어디까지 걸어야 내 그리움의 끝에 닿을 것인지
걸어서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면 밤 새도록이라도 걷겠지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버리고 나는 마냥 걷기만 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도 그냥 건성으로 지나치고
마치 먼 나라에 간 이방인처럼 고개 떨구고
정처없이 밤길을 걷기만 했습니다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다지만
짧은 이별일지라도 나는 못내 서럽습니다
내 주머니 속에 만지작거리고 있는 토큰 하나
이미 버스는 끊기고 돌아갈 길 멉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걸어서 그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대의 마음으로 갈 수 있는 토큰 하나를 구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부르튼 발은 상관도 안 할 겁니다
문득 눈물처럼 떨어지는 빗방울
그때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아아 난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 온 몸이 폭삭 젖은 걸로 보아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 이정하시집[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푸른숲
*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다
햇볕은 싫습니다
그대가 오는 길목을 오래 바라볼 수 없으므로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비에 젖을수록 오히려 생기 넘치는 은사시나무
그 은사시나무의 푸르름으로 그대의 가슴에
한 점 나뭇잎으로 찍혀 있고 싶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대
비 오는 날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오실 땐
햇볕 좋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제격이지요
그대의 젖은 어깨, 그대의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해주는 은사시나무. 비 오는 간이역
그리고 젖은 기적소리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는 싫습니다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려
차창 너머 그대와 닮은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그대처럼 더디게 오는 완행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
* 이정하시집[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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