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진강 12 - 아버님의 마을 - 김용택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논바닥 길바닥에 깔린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닭이 우는구나.
우리가 여기 나서 여기 사는 것
무엇무엇 때문도 아니구나.
시절이 바뀔 때마다
큰 소리 떵떵 치던
면장도 지서장도 중대장도 교장도 조합장도 평통위원도
별것이 아니구나.
워싱턴도 모스끄바도 동경도 서울도 또 어디도
시도 철학도 길가에 개똥이구나.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들을 깁더라.
두런두런 오손도손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더라.
그이들의 눈빛, 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들은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토착화되지 않을
이 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하며
나는 헐은 토방에 서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지 않는구나.
목이 메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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