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섬진강 13 -자연부락 - 김용택

효림♡ 2009. 6. 11. 08:17

* 섬진강 13 -자연부락 - 김용택

 

푸른 하늘
그 아래 청산
강이 있어 바라보고
그 강언덕 산자락에
사람들이 모여
물 나고 빛 좋은 곳 터를 잡아
영차영차 집을 짓고
힘써 논과 밭을 만들고
철 따라 꽃 피고 지고
씨뿌려 거두는 것같이
자식들을 늘려
동네를 이루어 살았으니
그게 몸과 마음 둘 땅이었더라.
강으로 가는 길을 두고

강 건너로 징검다리를 놓아
산에 길이 열렸으니
사시장철 흐르는 물이 맑았더라.
어디로든 길을 따라
사람들이 오고 가니
이 동네 저 동네
막힌 길이 없어
소와 쌀을
베와 쌀을 바꿔 썼더라.
앞산 뒷산 길을 따라
사내들이 나무 가고
집안에서 아낙들이 길쌈하여 베를 짜고
집짐승들 제 살붙이처럼 기르고
강으로 처녀들이 물길러 오고
총각들이 나무하여 강 건너오다
처녀 총각 눈이 맞아
소쩍새 이 산 저 산 울면
달 뜬 강변에서
강물을 황홀하게 바라보다
꽃등을 밝혀
한집안에 살며
앉아 지심 매고
서서 땅을 파면
콩 심은 데 콩 거두고
팥 심은 데 팥 거두고
땅의 임자로 오붓하게 살았으니
누가 보기에도 좋았더라.

비 묻어오는 골짜기는 우골이요
복사꽃 피는 앞산은 꽃밭등
큰 골짜기는 큰골이요
작은 골짜기는 작은골
절이 있으면 절골이라.
밭이 평평하면 평밭이요
논이 버선 모양이면 버선배미
배 뜨면 뱃마당
달 뜨면 달바위
벼락 맞은 바위는 벼락바위
쏘가리가 많으면 쏘가리 방죽
앞산이 길어서 동네 이름이 긴뫼라
사람들이 부르기 편하게 진매로 되었는데
일본놈들이 긴 장자에 뫼 산이라
장산으로 고쳐 버렸더라,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누가 지었는지 모르게
그 생긴 모양대로
이러저러한 이름이 생겨
사람들이 살 비벼 살며
곳곳에 사연과 이야기가, 내력이 보태져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니
우리집 식구들이 어디로 일 나간 것도
쉽게 찾겠더라.

동구에는 정자나무를 심어 지키게 하고
나무 밑 상석은

어른이 앉을 자리요
그 아래 순서가 저절로 정해져서
그게 위아래로 스스럼이 없어
질서가 걱정 없더라.
거기 그늘에 모여 쉬고 놀며 이야기하고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는
쓸데 없이 남고
쓸 것 있는 이야기는
쓸모있게 남아 쌓이고 간추려져
저기 저 물같이 유유하고 끝이 없으니
몸에 배어들고 살이 쪄
그게 또한 푸른 역사더라.
마을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아래로 모여들어
중지 모아 해결하며
매사에 불평불만이 없게 고르고
경우가 빤듯하니
그 경우 역시 평등과 정의여서
그게 요샛말로
민주주의요 그 전당이더라.
뉘 집 큰일 날 때마다
남의 일이 곧 내 일이어서
누가 뭐라 안해도 각자 모여들어
곡식과 품을 보태어 일 추리고
두레와 품앗이가 성하니
어허라 상사디야 그게 일과 노래요
일 새로 시작하는 달이 명절이요
농사 다 끝나면 명절이요
달 밝으면 또한 명절이요
다달이 명절이 있으니
쉬는 날이 있고
명절 때는 정자나무 그늘에 모여
어라차차 들독 들고
어기여차 힘 겨루고
훨훨 그네 뛰며
둥게둥실 춤을 추고
덩게둥게 농악 하며
다 이녁들의 몸짓과 노래로 흥겨웁게
고된 몸을 잠시 풀었으니
그게 일과 놀이를 위한 축제였더라.
마을이 위급하면
징과 장구를 울려
괭이 삽 낫들이 솟구치고
함성도 들려
앞산 앞내가 부르르 함께 치를 떨어
사람도 구하고
논과 밭을 지켰더라.
이러고 저러고 살며
해 뜨면 땀 흘려 논밭 갈고
해 지면 돌아와 저녁을 맞아
긴긴밤을 모여 이 얘기 저 얘기
살림살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로 지새우니
그게 또한 사랑방이어서
얘기하며 새끼 꼬고 망태 만들며
오손도손 살았더라.
밤과 낮이 바뀌더라.

누구는 이라자라 쟁기질 잘하고
소 잘 다루고
누구는 선일 잘하고
모 잘 심고 써레질 잘하고
누구는 논두렁 잘 붙이니
논일 밭일이 걱정 없고
누구는 집 잘 짓고 방 잘 놓고
쟁기 지게 뚝딱 잘 만들고
누구는 괭이 삽 호미 낫
띵깡띵깡 잘 다루니
농사 질 때 쓸 연장이 걱정 없더라.
누구는 밥 잘 짓고 떡 잘하고
술 잘 담고 삼 잘 삼고 밭 잘 매고
철그덕 철컥 베 잘 짜고
꼼꼼하게 옷 잘 지으니
집안일들이 잘 돌아가고
어떤 해 어떤 집엔
호박, 박이 잘 열리고
어떤 집은 가지, 오이가 잘 열려
콩 한조각도 서로 나눠먹으니
반찬이 그리 부족치 않더라.
누구는 글귀가 밝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귀동냥 손동냥 하여
글 잘하는 사람이 생겨나
세상 이치에 맞게 적발하고
축문과 제문도 쓰고 침도 잘 노니
그 사람 집이 글방이 되더라.
누구는 또 뭣 잘하고 뭣 잘하고
누구는 소리 잘하고
누구는 쇠 잘 다루고
누구누구는 징 장구 소구 잘 치니
모두 농악에 한가락씩 장기가 있어
이래저래 안과 밖으로
일과 놀이에 구색이 맞아
자연스럽게 다 소용되는 사람들이니
다 사람 구실을 하고
서로서로 사람사람을 다 귀하게 여기니
동네방네 일에 아귀가 맞아
다 사람 대접을 받았더라.

같이 슬프고 기뻐하며
태어나 살고 죽고 하는 일이
자연스러워 세상 인심에 큰 변동이 없고
잘살고 못사는 것 또한
다 자기 몸 쓸 탓으로 살아
사돈이 논을 사도 배가 안 아프고
빈부와 귀천이 없고
태어남에 근본이 같아
알고 모름에도 부끄럼이 없으니
쌀과 보리나 온갖 곡식과 채소가 잘 자라
여기저기서 불쌍치 않더라.
쌀과 보리가 불쌍치 않으니
밥 먹고 하는 일들이 좋아서
하늘 아래 땅 위에서
밥이 아깝지 않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