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섬진강 16 -이사 - 김용택

효림♡ 2009. 6. 15. 08:27

* 섬진강 16 -이사 - 김용택

 

  우리들은 저녁밥을 일찍 먹고 너나없이 모여들어 이삿짐을 꾸렸다. 거울 깨진 농짝 하나, 테맨 장독 몇 개, 헌옷 보따리, 때 낀 캐시미롱 이불. 그 흔한 흑백 텔레비 하나 없는 이런 촌 세간살이들이 서울에 가서 산다는 게 우습고 기맥히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말없이 이삿짐을 꾸려 회관 마당 삼륜차에 실었다. 아주머니는 연신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코를 풀어 치맛자락에 닦았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치거나 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확돌이나 헌 덕석, 망태, 절구통 같은 촌 물건들은 대충 이웃들에게 몇 푼씩 주며 팔거나 거저 주며 아주머니는 목이 메이는지 넋을 놓곤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들이 대대로 힘써 살았던 땅, 논과 밭과 온갖 과일나무들, 뒷산 몇백 년 묵은 귀목나무, 강 건너 평밭, 꽃밭등, 절골, 뱃마당에 두루바위, 벼락바위, 눈 주면 언제나 눈에 익어 거기 정답게 있던, 우리들이 자라며 나무하고 고기 잡고 놀아주었던 몸에 익은 정든 이름들이 구로동 성남 신길동 명동, 이런 낯선 서울 이름들과 엇갈리며 우리 머릿속을 쓸쓸하게 지나갔다.

  마당의 화톳불이 사그라져 가고 새마을 슬레이트집은 휑뎅그레 비워졌다. 마을회관 마당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서로 인사들을 나누었다. 아주머니들은 울먹이며 눈물을 훔치며 가다가 애들 빵이나 사주라고 구겨진 돈 몇 푼씩을 치맛속에서 꺼내어 주며 북받치는 설움들을 감추지 못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듬성듬성 줄어들어 있었고 우리들은 얼마나 가슴 아파했던가. 이제 떠날 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나고 회관 마당엔 어찌하지 못하는 나이 든 사람들과 몇몇 아이들만 남아 흐린 불빛 속에 어둡고 지친 얼굴로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는 우리들과 술을 마셨다. 논물 풀물든 구식 와이셔츠, 장가 들 때 맞춘 구겨진 양복과 닳아진 구두, 아이들은 그래도 좋아서 운전석에 앉아 빨리 가자고 조르는데, 우리들은 말없이 술잔들을 비우며 낫에 베이고 가시에 찢기고 삽이나 괭이에 찍힌 우둘투둘한 겁먹은 손들을 어색하게 덥석덥석 잡아 쥐며 말문들이 막혀 그저, 잘 있게 잘 가게 하며 서로 어깨 너머 캄캄한 어둠을 보곤 했다. 그는 뿌리치듯 짐 실은 차 뒤칸에 올라타 우리들을 외면했다. 아주머니들은 훌쩍이며 치맛자락을 걷어 올려 눈물을 닦고 아이들은 어머니들 치맛자락을 잡고 서 있었다. 저녁 내내 세간살이들과 한데서 시달릴 그를 생각하니 목이 메어 왔다. 차가 회관 마당을 서서히 빠져나가자 물소리가 크게 쏴쏴 저 앞 강굽이를 돌아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노딧거리를 비췄다. 강물소리가 쏴 하며 우리들 가슴을 크게 쓸었다.

  피와 땀과 살을 섞었던 땅, 버림받고 무시당하면서도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던 땅, 그래도 정 붙여 살았던 땅, 나이 서른 다섯에 이사라니.

  동구 정자나무를 빠져나간 차는 새마을 신작로길을 잘도 달리며 불빛을 여기저기 쏘아댔다. 차 꽁무니의 빨간 불빛이 동구길을 아주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회관 마당에 덩그렇게 남아 서로 얼굴들을 외면한 채 앉거나 서서 담뱃불을 빤닥이며 캄캄한 앞산을 바라보거나 땅을 내려다보며 그와 살 비벼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며 헤성헤성한 마음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둘 헛기침을 하며 어둑어둑 헤어졌다. 회관 불빛이 우리들 등뒤에서 각자 꺼지고 시커먼 어둠이 동네를 가득 메웠다. 그의 텅 빈 집 앞을 애써 외면하고 지나며 이제 아무도 이사들지 않을 꺼멓게 그을린 불빛 없는 그 이웃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또 소쩍새 울음소리나 부엉새 울음소리에, 강물 소리에 돌아눕고 돌아누우며 며칠 밤 잠을 설칠 것이다. 누가 또 떠나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섬진강 물소리가 한 번 큰 숨소리로 뚝 그쳤다가 힘겹게 이어졌다. *

 

* 확돌 - '돌확'의 방언.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