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섬진강 22 -누님의 손끝 - 김용택

효림♡ 2009. 6. 18. 08:12

* 섬진강 22 -누님의 손끝 - 김용택


누님.
누님 같은 가을입니다.
아침마다 안개가 떠나며

강물이 드러나고

어느 먼 곳에서 돌아온 듯

풀꼿들이 내 앞에 내 뒤에

깜짝 깜짝 반가움으로 피어납니다.
누님 같은 가을 강가에 서서

강 깊이 하늘거려 비치는
풀꽃들을 잔잔히 들여다보며

누님을 떠올립니다.

물동이를 옆에 끼고

강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강물에 이르르면
누님은 동이 가득 남실남실 물을 길어

바가지를 물동이에 엎어 띄워놓고
언제나 그 징검다리 하나를 차지하고

머리를,그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흘러가는 강물에 풀었었지요.
누님이 동이 가득 강물을 긷고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물장난을 치며

징검다리를 두어 간씩 힘껏힘껏 뛰어다니거나
피라미들을 손으로 떠서

손사래로 살려주고

다시 떠서 살려주며 놀다가
문득 누님을 쳐다보면

노을은 강을 따라 앞산을 오르고

누님은 머리를 다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혀 머리채를 흔들어 강바람에 말렸지요.
저 앞의 우뚝 큰 산의 솟구치는 산굽이 돌아오는

맑고 고운 강물속에
누님의 모습은

불길처럼 타는 노을과 함께

활활거렷습니다.
그런 누님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내 가슴은 쿵쿵 뛰었었습니다.
강바람에 하늘거리던 누님의 검정치마와 꽃자주고름,

그 고운 머릿결이
차곡차곡 내 가슴 어딘가에 서늘히 쌓이곤 했습니다.
누님,

누님은 붉은 댕기를 입에 물고

머리를 따 내리면서
나를 보며 가을 햇빛같이 쓸쓸히

때론 환하게 웃어주곤 했습니다.
누님은 머리를 다 따 내려 묶고

또아리를 곱게 빗은 머리 위에 가만히 얹고 앉아
또아리 끝을 입에 물고

눈 내리깔아

물동이를 이고 일어섰습니다.
물동이를 이고 징검다리를 건너뛸 때마다

남실거리던 물이 넘쳐 흘러내리면
누님은 이마를 흘러내리다 눈썹에 걸린 물을 훔쳐 뿌리곤 했습니다.
누님의 그 눈 내리깐 고운 청춘의 눈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뿌리는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누님의 손끝에선

풀꽃들이 피어나고

풀꽃들이 떨어졌습니다.
때론 작은골 큰골 붉은 단풍이 물들고

앞산 위에 반짝이는 샛별이 되고
초가 지붕 위에

하얀 박꽃이 피어났습니다.
강길이 다 끝날 때까지

누님은 그렇게 우리 마을 곳곳을 곱게도 물들이며 걸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누님은

일찍 물을 길어놓고
노을보다 먼저 징검다리를 건너

강변에 가 앉았습니다.
누님은 풀꽃들이 만발한 강변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무심히 풀잎들을 뜯어

잘근잘근 깨물었습니다.
강바람에 쓰러지고 일어나는 풀잎들,

풀꽃들이 하늘거리는
그 깊디깊은 눈으로

저 강굽이 끝을 보며
"그이는 꼭 살아 있을 거여

그이는 꼭 올 거여" 하셨지요
누님,

누님이 그때 그 말을 중얼거리며

풀을 뜯어 흩뿌리며
벌떡 일어나 화난 사람처럼 강을 건넜었는지

나는 몰랐었습니다.
다만,

그해 가을이 이 가을처럼 가고

겨울이 겨울처럼 온

어느 눈 내리던 밤
나는 잠결에 아버님의 진노하신

목소리에 잠이 깨었고
"그놈은 오지 안는다. 인자 그놈은

잊어부러...... 그놈은 그놈은......" 하시던 고함소리와
누님의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를 따라 내리는

눈 쌓이는 소리를 나는 숨죽여 들었습니다.
누님,

누님은 그날 밤 내 뒤척이고

눈은

들먹이는 산의 어깨를 따라 쌓이고

강에 내렸습니다.
누님,

누님이 보여주었던

그 바람 타는 강변 풀잎들이

지금도 저렇게,

어쩌자는 것인지 바람 속에 흔들거립니다.
풀꽃들이 넘어졌다가 일어나며
"그이, 그이는 꼭 올거여

꼭 올 거여" 하는 것 같습니다 누님.
누님은 이렇게 가는

어느 늦가을 살얼음을 깨고

시린 물소리를 따라갔습니다.
누님이 한번 들려주셨던

그 그이, 그이를 지금 나도 생각합니다.

내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해 지면 풀꽃들이 한없이 몰려와

저문 강에 몸을 씻고
더욱 황홀하게 드러났다

서늘히 식던 그 자태들을,
한 꽃이 지며 다른 한 꽃에

꽃을 넘겨주고 가던

그 다정한 계절의 손짓들을,
아무도 오지 않는

내 청춘의 저문 물가에

우두커니 서서

저물어오는 강물에
내 얼마나 오래오래

내 외로움을 적셔

늦꽃을 피웠었는지요.

누님,

나는 누님의 강물과

내 어린 강물이 보고 싶을 때면

물소리를 따라 강물로 가곤 합니다.
물소리를 따라 가장 낮게 가라앉아 흐를 때까지 따라가면

이 세상이 이 세상으로 소중하게

다가와 내 몸에 감겨옵니다.
사랑이 크면 외로움이 깊다는

그런 말들을 믿을 때쯤

나는 물소리를 따라가며

물소리 끝에 뼈가 시렸으나
그런 말들을 계절처럼 수정해가면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세상의 참모습이 바로 보이고

해야 할 일만 보임을 알게 되기까지
나는 누님이 머리 감고 일어서면

언제나 싱싱하게 물기에 젖어 있던

징검다리를 찾아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이 세상의 물소리 속에서

피비린 전쟁과 두 동강난 조국의 아픔을
그리고 용기와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

이별과 만남,

내 삶의 깊이와 폭을.

누님,

누님이 바라보며

그이를 기다렸던
저 슬픔과 괴로움과 그리움과 사랑의 여울지는 강물을

나도 바라봅니다.
아늑하고 평안한

바라봄의 저 강물을.

누님,

누님이 나를 데리고 강 건너로 가
바람에 쓰러지고 일어나는

바람 타는 풀잎들을 보여주었던

그 아름다운 날의 중얼거림,
그이 그이는 꼭 온다는

그 믿음이 세월을 따라 곧 내 믿음이 됩니다.
고개 들어

우뚝 일어서는 저 어두워져오는

산속을 보면
어둠속에 하얀하던

누님의 손,
그 손끝이 어둠을 뿌리며

어둠을 부르며 하늘거립니다.
그 손끝 따라

오늘도 강에 꽃들이 피어납니다.

누님,

그이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저기 저 물같이

들를 곳 다 들러

우리 땅을 골고루 적셔 채워주며
이 가을과 저 멀고 긴 어둠의 겨울을 뚫고

봄을 여는 물굽이로

저 산굽이를 돌아

눈부시게 올 것입니다.
그 힘찬 희망의 날에

우리 그리운 누님의 고운 강변에

풀꽃들이 만발하고
역사의 꽃수레를 끌고 가는 씩씩한

사내들을 맨발로 따라가는

내 누이들의 숨김 없는 싱그러운 웃음소리들이
산에 산산이 울려

강에 강강에 울려

누님의 손길을 따라

저 깊고 어두운 산과 강이
훤하게, 훤하게

꽃같이 훤하게

열릴 것입니다.
그러면 누님

이 서러운 강물을 쓸어안으며

저 하늘 보며
곱게 곱게 쓰러지십시오 누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