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눈이 멀었다 - 이정하

효림♡ 2009. 8. 14. 08:30

* 눈이 멀었다 - 이정하   

어느 순간

햇빛이 강렬히 눈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잠시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내 사랑도 그렇게 왔다
그대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줄
까맣게 몰랐다 *
 

* 개화   

그가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아도 그의 입만 쳐다본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또한,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시선이 따라간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꽃이 피는 순간을 기다려 보았는가. 굳게 오므린 꽃잎들이 서서히 부풀어오르는 순간 
그 순간은 결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느니, 눈 깜짝할 새 꽃망울은 터지고 마느니 사랑은 그렇게 은밀히 온다

 
어떤 한 사람 때문에,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의 존재 따위는 신경 써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죽을 때까지 뽑을 수 없는 마음속 꽃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다고 생각하라 *

 

나무는

외롭지 않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지만

더 멀어지지도 않았으므로

 

겉으로야 무심한 척 시침 떼지만

그를 향해 뻗어 있는 잔뿌리를 보라

남들 모르는 땅 속 깊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지 않은가 *

 

* 동행

돌이켜 보면 나는 늘 혼자였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기대고 싶을 때 그의 어깨는 비어 있지 않았으며
잡아줄 손이 절실히 필요했을 때 그는 저만치서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산다는 건 결국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비틀거리고 더듬거리더라도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길임을. 들어선 이상 멈출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그 외길.....

같이 걸어 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아아, 그것처럼 내 삶에 절실한 것은 없다 * 

 

별이 구름에 가렸다고 해서

별이 구름에 가려졌다고 해서 반짝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내 곁에

없다고 해서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시든 것은 아니다

 

우리 사랑에 늘 맑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름이 낀 날도 있다. 하지만

구름이 끼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만일 구름이 없다면 어디서

축복의 비가 내리겠는가 *

 

* 바보같은 사랑  

돌이켜보니, 사랑에는 기다리는 일이 9할을 넘었다
어쩌다 한번  마주칠 그 순간을 위해 피를 말리는 기다림 같은 것, 그 기다림

속에서 아아 내사랑은, 내 젊음은 덧없이 저물었다


하기야 기다리는 그 사람이 오기만 한다면야 어떠한 고난도 감내할 일이지만

오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던 우직스러움

 

그래, 사랑은 그런 우직한 사람만 하는 거다. 셈에 바르고 계산에 능한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척 얼굴만 찌푸리고 있지 잘 살펴보면 언제라도 달아날 궁리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 사랑은 그런 우직한 사람만 하는 거다
모든 걸 다 잃는다 해도 스스로 작정한 일,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제 한 몸 불태우는 단풍잎처럼 *

 

* 사랑은 가랑비처럼 와서  

가랑비에 속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참으로 오는 듯 오지 않는 듯 대지를 적셔주기에 흔히들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가 낭패를 보곤한다

 

사랑도 그런 것 같다. 자신도 모르게 다가와 어느 순간 눈을 떠보면 이미

마음마저 흥건히 젖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차라리 소낙비처럼 강렬하게 쏟아진다면 그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할 수도 있으련만

사랑은 대부분 가랑비처럼 슬그머니 다가와서  대책 없이 당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속옷이 좀 젖으면 어떤가

가슴이 사랑의 고뇌로 온통 멍이 든다 한들 또 어떤가. 마른 땅에는 비가

내려야 하듯, 우리 삶의 대지를 촉촉이 적셔 급기야 인생의 꽃을 활짝 피워 줄

사랑을 거부한다면 대체 우리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 이별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가슴앓이  

널 잊을 것이라던 나의 결심이 또 흔들리고 있다. 돌아서는 너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한 내가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었다. 잘 가라고, 행복하라고

한 마디 해줄 수도 있었는데 그냥 멍하게 서 있던 나. 그 아픔을 간직한 채

돌아서던 그대의 발걸음은 또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러나 나는 믿고 있다. 내 마음에 이별이 없듯 너와 내가 떨어져 있는 물리

공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떨어져 있으면 어떤가. 오랜 기간 볼

수 없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만 있으면 결코 헤어진 게 아니니까. 그래. 이별의 아픔을 느꼈다는 것

은 곧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지금은 비록 헤어지지만 결코 마지막이란 말은 하지 말자. 마지막이란 말로

다시 만날 그 가능성마저 공연히 지워버리지는 말자. 숨을 거두기 전까지 우린

절대로 마지막이란 말을 입에 담지 말자 *

 

* 이정하시집[아직 피어 있습니까 그 기억]-아리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