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 함민복

효림♡ 2009. 6. 29. 08:40

* 성선설 - 함민복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 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 한 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수 있나 
 
어쩌면 틀렸는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 한 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 앉은뱅이 저울  

물고기 잡는 집에서 버려진 저울 하나를 얻어왔다  

 

저울도 자신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양 옆구리 삭은 저울을 조심 뒤집는다  

 

삼 점 칠 킬로그램

무한천공 우주의 무게는

0 이더니

거뜬히 저울판에 지구를 담은

네 무게가 지구의 무게냐

뱃장 크다

지구에 대한 이해 담백하다  

 

몸집 커 토막 낸 물고기 달 때보다

한 마을 바지락들 단체로 달 때 더 서러웠더냐

목숨의 증발 비린내의 처소

검사필증, 정밀계기 딱지 붙은 기계밀정아

생명을 파는 자와 사는 자

시선의 무게에서도 비린내가 계량되더냐  

 

어머, 저 물고기는 물 속에서 부레 속에

공기를 품고 그 공기로 제 무게를 달더니

이제 공기 속에 제 몸을 담고 공기 무게를 달아보네

봐요, 물이 좀 갔잖아요

푸덕거림 버둥댐 오역하던 이도 지금은 없고

옅은 비린내만 녹슨 페인트 껍질처럼 부러진다  

 

저울은 반성인가  

 

늘 눌릴 준비가 된,

바다 것들 반성의 시간 먹고 살아 온

간기에 녹슨 앉은뱅이저울은

바다의 욕망을 저울질해주는

배 한 척과 같은 것이냐 

 

닻 같은

바늘을 놓아버릴 때까지 저울은 저울이다  

* 제6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수상작

*[시작]-2010년 겨울호

 

* 청둥오리 
청둥오리 알 품었다 하기에
규호 씨네 축사로 구경갔드랬습니다
지난번 비에 밭도랑 물이 고여
활주로가 생겨
청둥오리들 다 날아가고
소에 밟혀 다리 다친 놈 혼자 남아
저리 알을 품고 있다고
예뻐 죽겠다고
규호 씨 자랑이 상당했드랬습니다
알을 낳아 혼자 날아가지 않은 것은 아닐까
말을 건네자
규호 씨 더 환히 웃고
노총각 둘이서
예뻐라
청둥오리 구경을 한참 했드랬습니다 *
* 함민복시집[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 호박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했네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

속 가득 차 있을 씨앗

가족사진 한 장 찍어 본 적 없어 

호박네 마을 벌소리 붕붕

후드득 빗소리 들려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 본 밤

호박은 방안 가득 넝쿨을 뻗고

코끼리 귀만한 잎사귀 꺼끌꺼끌

호박 한 덩이 속에 든 호박들

그새 한 마을 이루더니 

 

봄이라고 호박이 썩네

흰곰팡이 피우며

최선을 다해 물컹물컹 썩어 들어가네

비도 내려 흙내 그리워 못 견디겠다고

썩는 내로 먼저 문을 열고 걸어나가네 

자, 出世다 *

* 함민복시집[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 흐린 날의 연서  

까마귀산에 그녀가 산다
비는 내리고 까마귀산자락에서 서성거렸다
백번 그녀를 만나고 한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고
먼저 전화 걸던 사람이
그래도 당신
검은 빗방울이 머리통을 두드리고
내부로만 점층법처럼 커지는 소리
당신이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 그 가죽의 주인
어느 동물과의 인연 같은 인연이라면
내 당신을 잊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독해지는 마음만
까마귀산자락 여인숙으로 들어가
빗소리보다 더 가늘고 슬프게 울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당신 *
 

함민복시집[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오는 길 - 한하운  (0) 2009.06.29
향수 - 정지용  (0) 2009.06.29
꽃 - 함민복  (0) 2009.06.26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0) 2009.06.24
찔레꽃 - 송찬호  (0) 2009.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