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찔레꽃 - 송찬호

효림♡ 2009. 6. 24. 08:32

* 찔레꽃 -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

* 송찬호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실연 
여자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여자는 말똥을 담는 소쿠리처럼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울을 보지 않고 지낸 얼마 사이 초승달눈썹 도둑이 다녀간 게 틀림없었다
거울 속 상심으로 더욱 희고 수척해진 비련의 여인에게 구애의 담쟁이덩굴이 뻗어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콤팩트를 열고 그중 가장 눈부신 나비 색조를 꺼내 자신의 콧등에 얹어놓았다
여자의 화장 손놀림이 빨라졌다 이제 여자의 코를 높이는 끝없는 나비의 노역이 다시 시작되었다 *

* 송찬호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 구두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탕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 민들레 꽃씨

하얗게 핀
민들레 꽃씨를
후우,
불었다

조그만
민들레 꽃씨가
바람을 타고

     후
   후   후
     후  후 후 후  후
  후  후  후
    후  후

날아간다 *

 

* 고래의 꿈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 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 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길 듣는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뻘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쏜살같이 해협을 달려 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꿈이 하나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 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

 

* 봄날을 가는 산경(山經)  

이그, 저기 가는 저것들 또 산경 가자는 거 아닌가

멧부리를 닮은 잔등 우에 처자를 태우고

또랑물에 적신 꼬리로 훠이 훠이 마른 들길을 쓸고 가고 있는 저 우공(牛公)이

 

어깻죽지 우에 이름난 폭포 한 자락 걸치지도 못한

저 비루먹은 산천이 막무가내로 봄날 산경 가자는 거 아닌가

일자무식 쇠귀에 버들강아지 한 움큼 꽂고 웅얼웅얼 가고 있는 저 풍광이

 

세상의 절경 한 폭 짊어지지 못하고 춘궁(春窮)을 넘어가는 저 비탈의 노래가 저러다 정말 산경의 진수를 찾아 들어가는 거 아닌가

살 만한 땅을 찾아 저렇게 말뚝에 매인 집 한 채 뿌리째 떠가고 있으니

검은 아궁일 끌어 묻고 살 만한 땅을 찾아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저 신선 가족이 가고 있으니 * 

* 송찬호시집[붉은 눈, 동백]-문학과지성사,2000

 

*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과수원

  노란 택시를 타고 가을이 왔다 그런데 그렇게 앳된 가을은 처음 보았다 가을은 최신 유행의 결혼 예복을 입고 있었다

새 손목시계  새 구두 노랗고 산뜻한 나비 넥타이가 따분한 인생으로부터 달아나려는 그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 구두에 달라붙는 흙을 피해가면서 그 얼뜨기 가을은 길을 몰라 한동안 과수원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나는 보았다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 사과의 이마가 발갛게 물드는 것을

  이윽고 가을이 울타리 너머 손을 뻗었다 찌를까, 찌를까, 탱자나무 가시의 망설임이 역력해 보였다 그럴법도 했다 

사과를 키운 건 가시이고 그 가시의 손으로 바람 속에서 요람을 흔들고 과육을 씻겨주었다

  그렇다 이젠 다 자라 그 과육의 치수랄지 가슴에 있을 앙증맞은 태양의 흑점 같은 비밀스런 이야길 탱자나무 가시가

아니라면 누가 들려줄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탱자나무 가시는 여전히 마무리 바느질에 바쁠 뿐이다 사과를 따가기 전 과육에 입힐

최후의 성장(盛裝)을 끝내야 했기에

  아, 그러나 청춘에 무슨 죄가 있으랴 가을은 이미 사과의 단맛을 맛보았고 삶의 서약 따윈 이미 이 계절로부터도

저렇게 멀리 뒷걸음쳐 달아나 있으니 *

* 고규홍저[나무가 말하였네]-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