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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 지옥 1~3 - 김지하

효림♡ 2009. 6. 24. 08:26

* 지옥에 - 김지하  
지옥에 청정한
나무 한 그루만
잎새 하나만 있다면
그것은 하늘
생명의 기억
나무처럼 잎새처럼
팔을 벌리고
창세기를
창세기를
다시 시작하리라 

 

* 지옥 1

꿈꾸네
새를 꿈꾸네
새 되어 어디로나
나는 꿈을 미쳐 꿈꾸네
가름투성이 공장바닥 거적대기에
녹슨연장 되어 쓰레기 되어
잘린 손 감아쥐고 새를 꿈꾸네
찌그러져도 미쳐 눈 감고 꾸네
하얀 연이 되고 꽃 피고 푸른 보리밭도 되고
미쳐 새가 되고 콩새가 되고
붉은 독촉장들이 수없이
새 되어 사라지고 가서 돌아오지 않고
끝없이 알 수 없는 공장문 밖 어디로나 끝없이
체납액 정리실적 복명서
세입인별 징수부 영수증 명세서 집계표 고지서
내 손을 떠나 파랑새도 되고
까마귀도 되어 사라지고 가고 없고
돌아오지 않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기름투성이 공장바닥 거적대기에
멍청히 남은 갓스물
소화 20년제의
아아 나는 낡아빠진
가와모도 반절기
찍어내고 찍어내고 잘리고 부러지고
헐떡거리며 지쳐 여위어 비틀거리며
녹슨 연장이 되어 찌그러져 미쳐 그래도
새를 꿈꾸며 잘린 손 감아쥐면
예쁜 색동이 되고
팔랑개비가 되고
고향집 벽에 붙은 빨간 딱지가 되고
꽃상여 되고
기어이 기어이
울음 우는 저 밤기차가 되고

꿈꾸네
새를 꿈꾸네
새 되어 어디로나
날으는 꿈을 미쳐 꿈꾸네
남진이 되어 남진이 되어
저 무대 위
저 사람들 위
저 빛나는 빛나는 조명등에 빛나는
저 트럼펫이 되어
외쳐보렴 목터져라 온 세상아 찢어져라 찢어져 없어져 사라져
호떡도 수제비도 잔업도 없는 무대 위에 남진이 되어 새 되어
사라져가렴 손가락아 제기랄!
아무것도 아무것도
뒤에는 아무것도 추억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잘려나간
내 갓스물아
영화나 되어
낮도 밤도 없는 시커먼 영등포
멍청히 남은
소화 20년제의
아아 나는 낡아빠진 가와모도 반절기
 

 

* 지옥 2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여기 그 누구도
그 흔한 예수마저도 믿을 수 없는
내일은 반드시 수염을 깎겠다는 나의 작은 결심조차도
아서라
못 믿을 거리, 아 나직나직한
바람 속 죽은 흙들이 가슴에 고여내려
마주 잡는 손바닥에마저
아서라
돌이 자라는 거리,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핏발 선 네 뜬눈의 거리

잿빛 쌓인 구름의 저기서 이리 천천히 다가오는
마른번개의 이 기이한 날에마저
기계소리에 막혔나 기계소리에 막혀
잎새 없는 나무들의 침묵에 막혔나 침묵에 막혀
아서라
장갑을 끼지 않고는
손조차도 아예 못 잡을 거리
아아
붙잡으면 날카로운 저 수없는 칼날이 미쳐
아서라
그렇게도 조용히
흙들이 끄여내려
돌이 되는 거절하는 네 알 수 없는 뜬눈의
아아 메마른 십일월의 거리
구로동 길 언저리
침묵한 거리

 

* 지옥 3

노동 속에서 기어나오는
뱀을 보아라
뒤에 따라나오는 나리꽃도 보아라
우렁찬 나팔소리가 들리고
손에 손에 산이 번쩍 들려 드디어는
바다에 빠진다 보아라
이 빠진 기아에 손가락을 끼우고
기아만을 빠르게 온종일을 미쳐 미쳐 돌아간다
피 터지듯이
사지에 소리없이 통곡이 터져
흘러내린다
나리꽃
아아 눈부신 저 노을 속의 나리꽃
기계에 감겨
숨져가는 나의 육신이 육신의 저 밑바닥까지
기계에 감겨
회전하며 울부짖으며 기계가 되어가는 지옥의
저 밑바닥에서
보아라
나의 눈에 보이는 피투성이의
내 죽음과 죽음 위에 피어난 흰 나리꽃
사이의 아득한 저
혼수의 밑바닥까지
꿈이냐
아아 이게 생시냐
우렁찬 나팔소리가 들리고
손에 손에 산이 번쩍 들려 드디어는
바다에 빠진다 보아라 저것 보아라
기인 긴 지옥의 노동 속에서
노을 무렵에
미쳐 숨져가는 나의 저기 저 뒤틀린 눈매의
넋을 보아라
친구여
지친 살을 보는 내 눈 사이에 열리는 노을 같은
피투성이의 저 새하얀 꿈을 보아라
내 한줌의 살과

 

*김지하시집 [ 타는 목마름으로]-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