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밥그릇 경전 - 이덕규

효림♡ 2009. 7. 28. 08:54

*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꼼이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 洗鉢盂去.세발우거

 

* 논두렁  

찰방찰방 물을 넣고

간들간들 어린모를 넣고 바글바글 올챙이 우렁이 소금쟁이 물거미 미꾸라지 풀뱀을 넣고

온갖 잡초를 넣고 푸드덕, 묽닭이며 논병아리며 뜸부기 알을 넣고

햇빛과 바람도 열댓 마씩 너울너울 끊어 넣고

무뚝뚝이 아버지를 넣고 올망졸망 온 동네 어른 아이 모다 복닥복닥 밀어 넣고   


첨벙첨벙 휘휘 저어서 마시면,  


맨땅에 절하듯

 

누대에 걸쳐 넙죽넙죽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린 생각들 길게 이어 붙인

 

저 순하게 굽은 등짝에 걸터앉아

 

미끈유월, 그 물텀벙이 한 대접씩 후르륵 뚝딱 들이켜면

허옇게 부르튼 맨발들 갈퀴손가락들 건더기째 꿀떡꿀떡 넘어가겠다 * 

 

* 작대기가 지게에게 - 夫婦뎐 

오늘 같이 비 오시는 날

녹두전이나 서너 장 부칠 일이지

막걸리나 한 되 받아올 것이지

안살림이라곤

죽도 못 쑤는 저년

짬짬이 벌렁 자빠져서

이내 코를 고는 저 태평한 년은

또 세상 모르고 낮잠만 자네

살림 아무리 제가 다 졌다지만

명색이 이 집 기둥인 서방을

쟁기 마루 위 멍에 줄에

홀아비좆같이 보는 년, 이제

다시는 안 쓸 것처럼

질척질척 비긋는 마당에 팽개치고

퍼질러 잠만 자는 저 미련한 년

 

에라, 나도야 기왕에 몸 버린 날

뻣뻣한 몸 풀고 스르르

스르르 강둑 너머 과부네

눅눅한 아궁이 앞에

또아리 틀고 앉아 구시렁구시렁

변강쇠전이나 들려주러 갈라네

 

* 지게가 작대기에게 - 夫婦뎐 

아무거나 뚝뚝 분질러다가 삼은

짝이 아닌데요 뒷산 그 많고 많은

나뭇가지 중에 하루해를 꼬박

골라 다듬어온 당신인데요

세상에 남정네가 많다 한들 어디

당신만 한 버팀목이 있을라구요

보세요, 더러 망나니 같은

큰놈 맷집 키워주러 나가지요

또 급한 대로

약 오른 콩깍지 털러 가구요

더러는 애들 손에 이끌려 앞산

토끼 잡으러 가는데요 저런

삐끗한 할머니 발목 부축하고

마실 가네요 심지어는 구정물통에

빠져 죽은 쥐새끼 건지러 가는 당신

집안 대소사 급한 대로 잡히는 게

당신인 걸 어쩌겠어요

러나 당신, 언제고 부르면

지척에서 달려와

나를 받쳐주는 당신, 의지가지!

당신 없인 난 정말 하루도 못 살아요

 

* 연애질 

북조선에선 남녀가 사귀는 걸 두고 연애질이라고 한다는데, 연애질!
그 질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게 보여
삽질 가래질 쟁기질 써래질 호미질 낫질로 일구어낸 만 평 푸른 보리밭 물결이 보이고
휘영청 달빛 젖은 이랑 사이로 밤새 축축하게 걸어놓은 물방아 소리 들려오는데
누가 거기 대고 손가락질을 하겠어
뭔가 질퍽대고 싶은 게 사랑인데
흘끔흘끔 곁눈질만 하다가 깔짝깔짝 입질만 하다가 돌아서는 당신
어디 이걸 낚시질이라 할 수 있겠어
핏대 세우고 삿대질만 해대는 당신들 쌈질은 발길질 주먹질로 걸어야지
연장 있으면 뭐해 연장질을 해야지
애정 전선에 균열이 생기면 즉시 구멍 난 냄비나 솥단지 때우듯
물 샐 틈 없이 온몸으로 땜질을 해야지
열흘 굶고도 도적질할까 말까 망설이는 당신 말이야
그 우라질 마음만 있으면 뭐하냐구, 몸이 떠나는데 그걸 뭣에다 쓰냐구 젠장! *

 

* 머나먼 돌멩이

흘러가는 뭉게구름이라도 한번 베어보겠다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서
수수억 년 벼르고 벼르던 예각의
날 선 돌멩이 하나가 한순간, 새카만 계곡 아래 흐르는 물 속으로 투신하는 걸 보았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 닳은 몽돌까지 *

 

* 식물도감을 던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들판에는 참 많은 꽃들이 피어나지만 그 이름들을

낱낱이 아는 이는 우리 동네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씨 뿌릴 즈음에 피었다가

가을걷이 추수철이면 앙상한 꽃대들이 말라비틀어질 뿐, 더러는

사람들이 그 꽃 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들밥을 먹고

더러는 쇠똥에도 눌려 주저앉고 억센 맨발에 짓이겨져도 그것들은

늘 거기에 피었다가 지고 말 뿐

 

어느 누가 그 이름을 불러

아름답다거나 남루하다거나 신비롭다 하는 말을 했던가, 있는 듯 없는 듯이

서로에게 불러줄 이름이 없던 그 시절부터 맛 달고 향기로운 꽃 찾아 따 먹으며

나 여기까지 흘러왔느니 누구 하나 내게 그 이름 들려준 적 없고

너희들 이름 불러본 적 없었다

들꽃들아! 네 이름을 모르고 간 사람들

오늘 다시 이 외진 들길마다 못다 한 말 못다 한 울음 저토록 많은 씨알 속에서 터져 오르는데

 

저마다 아름답고 신비롭고 남루한 서러움의 향내 돌아 그렁그렁한 눈빛들 맞추고 바라보면

아-하, 늦저녁 들판에서 돌아오는 지친 암소 발굽에 쓰러지면서도 이른 저녁 별들에게

기꺼이 손 흔들어주던 낯익은 얼굴들,

통성명도 없이..... 너희들 이름을 내가 너무 많이 알아버리고 말았구나

 

* 오, 새여

강변 모래톱에 어지럽게 흩어진 새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물가에서 방금 날아간 듯한//

선명하고도 깊은 마지막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하여 달려간//

생의 도움닫기 끝에 찍힌//
지상의 그 웅숭깊은 마지막 족적 속에서 광대무변의,//
그 먼 나라에서 흘리는 당신 눈물이 말갛게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

 

* 이덕규시집[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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