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춘추(春秋) - 김광규

효림♡ 2009. 7. 29. 08:08

* 춘추(春秋) - 김광규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

* 김광규시집[시간의 부드러운 손]-문지

 

* 가을 거울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음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을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

* 김광규시집[시간의 부드러운 손]-문지

 

* 가을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은
허전하다
땅을 덮은 것 하나도 없이
하늘을 가린 것 하나도 없이
쏟아지는 햇빛
불어오는 바람
하늘을 가로질러
낙엽이라도 한 잎 떨어질까봐
마음 조인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렇게 견딜 수 있을까  
명령을 받고
싹 쓸어버리기라도 한 듯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은
두렵다 *

 

* 묘비명(墓碑銘)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 대장간의 유혹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

 

* 도다리를 먹으며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 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

* 김광규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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