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효림♡ 2009. 7. 30. 08:28

물 속 빈 산 꽃피는 소리 - 이성선

하나 등에 지고 산도 하나 지고
둥그런 어둠 속을
밤 열어 길 열어 가는 사내
길바닥 드문드문 괸 빗물에 내려비친
하늘을 지켜보다
하늘 안으로 사라져 들어간 물 속 빈 산
꽃피는 소리 만나러 가는 사내
산에 닿아
짐 벗어놓고
돌아오지 않은 사내

* [이성선 시전집]-시와시학사  

 

* 사랑하는 별 하나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 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춰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

 

* 소식

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

 

그의 귀에 새벽 네 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

 

* 산책  

안개 속을 들꽃이 산책하고 있다
산과 들꽃이 산책하는 길을 나도 함께 간다
안개 속 길은 하늘의 길이다
하얀 무명천으로 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안에
나도 들어가 걸어간다
그 속으로
산이 가고 꽃이 가고 나무가 가고 다람쥐가 가고
한 마리 나비가 하늘 안과 밖을 날아다니는 길
발 아래는 산, 붓꽃 봉우리들
안개 위로 올라와서 글씨 쓴다
북과 피리의 이 가슴길에
골짜기 고요가 내 발을 받들어 허공에 놓는다
써 놓은 글씨처럼 엎질러진 붉은 잉크처럼
아침 구름이 널려 있다
이 붓꽃에서 저 붓꽃으로 발을 옮길 때
안개 열었다 닫았다 하는 세상이
내 눈 안에 음악으로 산다
안개 속을 풀꽃 산 더불어 산책을 한다 *

 

*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인가 

바라보면 지상에는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 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듯

나무도 나를 바라보고 아름다워 할까

나이 먹을수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 숙여 질까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영원의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 산목련꽃

산목련꽃이 벙그는 날
막 입속의 혀
붉은 꽃술이
반만 보일락 말락 할 때
그것은 순전히
아직 한 번도 세상 남자를
접해보지 못한
아, 산중 처녀의
순결한 음부.
가까이 다가가면 몸 닫아버릴 듯
그 앞에서 눈을 감으니
나직이 울리는 먼 산 향기.
나는 갑자기 와락 달려들어
그의 중심에다
나의 혀를 갖다 대어본다.  
한밤에 너를 몰래 폭행하겠다.
그 다음 산의 큰 천둥소리에

맞아 쓰러지겠다.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랜덤하우스중앙

 

* 나 없는 세상 ―山詩30   

나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저 물 속에는

산 그림자 여전히 혼자 뜰 것이다  

 

* 뿔을 물어뜯다  ―山詩9 
진흙 묻은 소가
빗줄기 몇 가닥에 목을 씻고 지나간다


번개 짐승이
달려들어 소의 뿔을 물어뜯는다


깜깜한 지상
연꽃 피는 소리 들린다 *

 

* 초암(草庵)에서

사람이 오래 가지 않은 암자가

풀잎 속에 쓰러지듯 앉아 있다

 

누구를 향해선지 밖으로 난 작은 길 하나

스님은 달빛 길을 쓸지 않는다

 

경계가 없는 경내

잎사귀들은 제 살을 먹여 벌레를 기르고

 

저녁이 와도 산은 스스로

문을 닫지 않는다

 

단지 산 안에 산의 파도가

흐린 안개 속에 잔다 *

 

* 백담사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

 

* 봉정암 가는 길

길 따라 굽어 흐르는 물 백 개의 연못에 백 번 얼굴을 비추고 백 번
마음을 고쳐야 열리는 山門. 귓가에 넘치는 물소리가 모두 법문이고
가지의 바람소리가 오도송이며 우거진 쑥대풀과 억새꽃이 다 詩다

골짜기로 밤에 쏟아지는 별들이 물 속에 빠져 꽃잎처럼 떠 있는 곳
으로 발을 옮기는 이가 영원히 거기서 길을 잃고 나오기 싫어한다

단풍 사이로 난 좁다란 길에 노랗고 빨간 잎사귀가 떨어지고 그 곁
에 찍힌 사람 발자국이 깨끗하다. 고라니 발자국 같아서 먼저 간 사슴
발자국 같아서 일찍 깬 새벽 공기가 입을 대고 냄새 맡고 바람이 와서
손으로 만져 본다. 사람 자취가 여기서 처음 신성하다

산 전체가 구름 옷을 벗고 있다.산이 깨어나는 소리 듣는다. 나무
사이로 아침 안개가 햇살에 쫓겨 바삐 달아나며 빗물 머금은 산빛과
내음을 세상 아래로 실어간다.구름이 산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길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내가 있다 없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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